[인권교육, 살짝쿵] “당신이 현장을 알아?”
인권교육가들이 서게 되는 시험대에 대하여

‘이 시간을 엄청 기다렸어요!’ 기대에 찬 표정으로 교육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 참여자들을 만나면 절로 기운이 솟아납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자발적이고 호의적인 참여자들만 골라서 만날 수 있게끔 인권교육 환경은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특히나 법이나 조례를 통해 의무로 불려 나와 인권을 처음 접하게 되는 직업군들이 많아지면서 인권교육가들은 의욕 없는, 의심에 찬, 공격적인, 또는 냉소에 찬 참여자들과 대면해야 하는 고초를 겪곤 합니다.

교육장에 들어선 나의 외양이나 직함만을 보고 강사로서의 자격을 의심받을 때, 이런 교육이야말로 인권침해라고 주장하거나 혐오할 자유를 주장하는 참여자를 만날 때, 참여자들이 애써 준비해간 프로그램 참여를 대놓고 거부할 때, 교육가들이 순간적으로 기지와 내공을 발휘해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귀찮은데 토론시키지 말고 빨리 끝내기나 해라.’ ‘커피나 마시러 가자.’ 지난 5월말 총경 승진 예정인 경찰간부들이 대거 참석한 성평등 교육에서 참여자들의 공격적 반응과 무더기 자리 이탈이라는 곤경에 처한 강사의 사례가 남의 일 같지 않은 이유입니다. (관련 기사 보기: 두리번, “‘유치원생 같다’?”)

인권교육은 자꾸만 나를 시험대에 세운다

당신이 현장을 알아?”에 숨은 뜻

얼마 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촉 강사단과 만나 참여자의 이런 반응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대처해나갈지 점검해보는 교육을 진행했습니다. 여러 부정적 반응 가운데 인권교육가들이 가장 난처해하는 반응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당신이 현장을 알아? 그럼 당신이 와서 한번 해보든가!’ 사회복지사, 의료인, 교육자 등 전문직군의 참여자들이 마뜩지 않은 표정으로 교육장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심지어 ‘강사님이 몰라도 너무 모르시네~’와 같은 눈초리를 보낸다면 위축되지 않을 교육가는 많지 않을 겁니다.

해법을 찾으려면 먼저 참여자가 보내는 신호의 숨은 뜻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할 겁니다. 메시지의 방향에 따라 접근법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현장을 모른다는 이야기가 처음에는 ‘인권교육 필요 없다’는 단순한 거부로만 읽혔는데, 숨은 뜻을 헤아리다보니 다양한 결들의 이야기가 발견되었습니다. 현실에선 이 모든 메시지들이 중첩되어 있는 경우가 많겠지만요.

  • 교육 내용이 현장과 동떨어져 있다(떠 있다)
  • 원칙적인 이야기는 그만하고 구체적 해결책을 알려 달라
  • 우리가 아는 현장은 그렇지 않다 (교육가의 진단이 틀렸다 또는 현장이 많이 달라졌다)
  • 우리를 왜 가해자 취급하냐
  • 당신이 와서 하면 다를 줄 아냐
  • 이 이야기를 들어야 할 사람(예: 관리자)은 따로 있다

 

이 가운데 ‘당신이 와서 하면 다를 줄 아냐’와 ‘이 이야기를 들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는 메시지가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얼핏 인권교육(가)에 대한 거부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참여자들이 자기의 ‘권리/권한 없음’을 고백하고 있는 순간은 아닐까요?(실제로 아무런 권한이 없는지는 따져볼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이때 교육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저는 여러분의 ‘권리/권한 없음’에 대해 다루려고 왔습니다.” 참여자의 마음을 짐작하여 교육의 첫 시작부터 정공법으로 접근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현재에 머무르고 싶은지 아니면 변화를 일굴 권리를 갖고 싶은지, 후자라면 먼저 인권에 대해 알아야 하고 권리/권한/권력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로 교육의 문을 열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참여자의 태도를 전환시킬 방안을 궁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이들 메시지의 상당수는 교육가의 자기 점검과 교육내용의 수정/보완이 필요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으니까요. 이날 교육에서는 대략 아래와 같은 과제들을 함께 떠올려 보았습니다.

  • 현장에서 ‘떠 있는’ 교육을 진행하지 않으려면 현장에 관한 이해를 두텁게 하는 공부가 뒤따라야 한다/뒤따를 수밖에 없다.
  • 현장은 자칫 ‘자기만의 우물(현장)’ 안에 갇힐 위험이 크다. 인권교육이 모든 해답을 제시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다른 현장의 변화 사례를 안내해주는 것은 교육의 구체성을 높이기 위해 필요하다.
  • ‘가해자 취급’과 ‘가해가능성에 대한 인정을 돕는 것’은 다르다. 참여자를 대하는 교육가의 태도가 어떠한지 점검이 필요하다.

 

현장에 대한 앎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권교육가가 아무리 열심히 교육내용을 보완하고 자기 태도를 점검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아는 현장은 그렇지 않다’라는 반응이 강력하게 제기될 때 해법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육가는 ‘외부자’이고 현장의 구체적 변화 숨결을 충분히 짐작하기란 어렵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현장에 있는 참여자들은 충분히 알고 있고, 외부자인 인권교육가는 그만큼 모른다는 이야기를 마냥 수긍할 수만은 없습니다.

첫째, 참여자가 말하는 ‘우리’는 모두 같은 의견을 갖고 있는가. 사실은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몇 사람’이 전체를 대표하기를 자처한 것은 아닌가. 예컨대, 같은 교사라고 해서 모두가 ‘우리 학교엔 문제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수 있으니까요. 당연하게도 대개의 현장은 이런 인식의 차이들도 가득 차 있습니다.

둘째, 그가 말하는 현장은 누군가를 삭제한 채 편집된 현장은 아닌가. 예컨대, 모든 교사들이 ‘우리 학교엔 문제없다’고 말하지만, 학생들의 입장에선 ‘우리 학교엔 문제가 너무 많다’고 말할 수도 있으니까요. 스쿨 미투가 일어난 학교에서 교사들은 대개 ‘그 교사가 그럴 분이 아니다’라는 반응을 보이지만, 그런 반응을 보이는 교사들은 가해 지목 교사의 언행으로부터 안전한 위치에 있었기에 몰랐을 수 있습니다.

셋째, 앎을 어디에서 오는가.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탐색하지 않기에 자기가 모른다는 걸 발견하기가 오히려 힘들 수 있습니다. 인식의 퇴보가 당연한 수순입니다. 모르는 것이 안전하거나 덜 불편하기에 더 알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알기 위해 질문하고 탐색합니다. 현장을 알기 위해, 현장의 다양한 목소리를 파악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래서 때로는 ‘외부자’가 현장의 이면을 읽어내는 ‘내부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외부에서 들어간 인권교육가는 현장에 있는 이들보다 모른다 또는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전제 자체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현장’ 안에서 무수히 경합하는 진실이 존재함을 드러내는 서사를 가져가거나 참여자들 스스로 ‘우리’ 안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해갈 필요가 있겠지요. 인권교육가가 모른다고 공격하던 참여자들이 스스로 ‘모른다’는 것을 발견할 때, 인권교육이 수용될 마음자리가 열릴 수 있을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함께 던져보고픈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교육은 교육가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풀어놓는 장인가, 아니면 교육이 시작된 뒤에도 앎은 새롭게 일어나는가. 현장을 궁금해 하는 교육가라면, 결국 변화를 만들어내는 이들은 참여자라고 믿는 교육가라면, 교육이 시작된 다음에도 현장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질문과 참여의 기회를 열어놓을 겁니다.

현장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쩌면 더 잘 알 수도 있다는 역설. 이 역설 속에 ‘당신이 현장을 알아?’라는 반응을 다루는 해법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입니다.

 

* 글쓴이: 경내_개굴(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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