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살짝쿵] 혐오표현의 자유는 없다.

얼마 전, 한 지역 주민 활동가 양성 교육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자유권을 중심으로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질문을 몇 개 준비해서 참여자들과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기억하기로 세월호 이후 일베의 “폭식 투쟁” 등을 기점으로 그들의 막말을 ‘표현의 자유’란 이름으로 포장해서 옹호하는 논리가 여기저기서 본격적으로 들리기 시작한 것 같아요. 2000년대부터 이어져온 퀴어문화축제가 사회적으로 좀 더 가시화된 시점에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을 표현의 자유로 “쉴드 치는” 사람도 보였고요. 근대 인권의 역사를 밀어온 전통적 권리 중 하나인 표현의 자유가 그렇게 ‘오염’되가는 모습을 보면서, 인권교육에서 관점을 잘 벼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유권교육에서 나눈 슬라이드. "전쟁을 거부하는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가 정당하다면 성서의 믿음에 따라 동성애를 받아들일 수 없는 나의 신념도 존중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전쟁을 거부하는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가 정당하다면 성서의 믿음에 따라 동성애를 받아들일 수 없는 나의 신념도 존중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참여자들의 생각을 촉발하고 토론해보고자 준비해 간 이 문장은 미국 드라마 <굿와이프>의 한 장면을 참고했습니다. 드라마의 한 에피소드에서 주인공 변호사가 동성결혼을 주제로 한 모의법정에서 논쟁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거든요. 게이 커플에게 웨딩 케이크를 팔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소당한 빵집 주인은 서비스 제공을 거부할 수 있다는 자신의 권리를 ‘종교의 자유’로 방어합니다. 크리스천 또한 동성 커플과 같은 보호 계층에 해당한다 그리고 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가 인정 받는 것처럼 동성 결혼을 받아들일 수 없는 종교적 신념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드라마를 보다가 병역거부를 들이대는 부분에서 저도 순간 “헉” 하고 막혔던 기억이 나서, 활동가 정체성을 가진 참여자들이 많기도 하니 더 풍부한 토론이 되길 기대하며 저렇게 문장을 만들어보게 됐습니다.

결과적으로 ‘풍부한’ 토론이 된 것 같긴 한데,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는데요(머쓱).

“지금 우리 나라 그거(병역거부권) 된 거에요(인정된 거예요)? 아 그렇구나…우리 집에 남자가 셋인데 그럼 군대 갔다온 사람은 다 비양심이란 거예요?”,

라는 미처 예상못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차별을 옹호할 자유’란 말이 성립가능한지 생각해보고자 넣은 병역거부란 부차적 소재가 오히려 참여자의 생각을 사로잡은 것이죠. 한 질문 안에 두가지 전제가 있었고, 앞의 전제(“병역거부권 인정”)에 대해선 작년 병역거부 관련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라는 헌재 판결 뉴스가 워낙 많이 나오기도 해서 그 자체는 토론이 필요없을 것이란 저의 착각이 부른 결과였습니다.

이 분 덕분에 양심이 예전 tv프로그램 “양심 냉장고”의 용례에서처럼 ‘착한 마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윤리적 확신에 관한 것이라는 점 그리고 양심의 자유는 어떤 거창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반성문이나 (준법)서약서처럼 한국 사회의 다른 장면들에서도 좀 더 적극적이고 일상적인 접근이 필요한 감각이라는 점을 환기할 수 있긴 했지만, 질문 구성 과정에서 스스로 놓친 부분을 반성하게 됐어요. 동시에 한편으론 ‘군대 간 사람은 비양심’이냐는 20년째 같은 질문을 넘어선 논의는 어떻게 가능할까 서글픈 생각도 들었고요.

그리고 다시 본 질문 토론으로 넘어갔는데요.

그거 동성애법인가 그런 거 아니에요? 우리 교회 앞에서도 반대서명 하는 거 봤어요. 목사님이 설교하는데 그 법 생기면 자기 처벌받는다면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내용으로 설교를 하는 목사가 있는 교회를 다니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차별금지법을 ‘동성애법’이라 부르며 혐오를 선동하는 보수 교회의 영향력을 새삼 확인했지요. 이 분 이야기에 어떻게 이어갈까 속으로 고민하던 그때 다른 참여자 한분이 말을 잇습니다. “저도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요, oo방송에 동성연애 사례가 나오더라고요”라면서 “그 사람들이 무서운 게 소아성애로 넘어간다더라” 이야기였습니다.

궁금함이라는 자세로 시작한 듯했던 발언이 길어지면서 더 듣기가 힘들더라고요. “죄송하지만 말씀을 계속 듣기 좀 힘들어서 가짜뉴스 이야기는 그만 들을게요.” 참여자와의 관계에서 마이크를 쥐고 있는 교육가의 위치성(과 권력)을 떠올리며 참여자 입장에서 자기 느낌과 생각을 편하게 꺼낸 것이라 해석했다가는 (설령 발화자는 차별의 의도가 없었다 할지라도) 혐오발언이 지속되는 것을 내버려두는 결과에 다름 아니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무리 깊은 믿음에서 나왔다 해도 모든 신념이 양심은 아니다. 인간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 한다.”

작년 병역거부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 조효제 교수가 “인권에서 양심이란 무엇인가”란 제목의 칼럼(링크)을 썼는데요. “깊은 생각에서 나온 신념이라면 다 양심인가” 질문하면서 히틀러의 예를 듭니다. 히틀러가 ‘진심으로’ 인종차별주의를 확신해서 홀로코스트(대학살)를 저질렀다면 그것도 양심이라고 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그런 맥락에서 현대 인권에서 말하는 양심은 “인간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전제”가 추가로 더 요청된다고 말했습니다.

2015년 메갈리아의 등장과 함께 ‘미러링’ 전략을 두고 “후련하다”는 반응과 “아니다 그래도 똑같은 혐오는 아니지 않느냐” 논의가 촉발하던 즈음에 나왔던, 누구의 표현의 자유인지 따져야 한다는 글(링크)이 기억나는데요. 거친 입담으로 유명한 미국 스탠드업 개그에도  “약자에게 주먹을 날리지 말라 don’t punch down”라는 불문율이 있단 얘기였습니다. 표현의 자유라고 해서 무조건 다 용인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럼 이제 남는 질문은 “누가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는가” 입니다.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는 이들이 “동성애법 통과되면 자기가 처벌받는다”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거나 자신들의 표현의 자유라고 둘러대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기도 한데요.

이 고민에 대한 응답으로 교육 때 종종 인용하는 예는 “당신의 이웃으로 다른 인종과 함께 살 수 있겠느냐”는 취지의 질문에 대한 국가별 가치관 조사(링크) 중 미국의 응답율에 대한 해석입니다. 인종 문제에 있어 ‘정치적으로 올바른’ 응답이 높게 나온 것은 실제 미국 사회에 인종차별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라 적어도 인종차별적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감각이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입니다.

한국에서 “차별은 안 돼요”란 추상적 명제를 부정하는 이는 없지만 구체적 사안에 대해선 “그게 무슨 차별이냐”라거나 “내가 더 피해자”라는 말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미국인들은 인종차별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간에 그런 차별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기에 차별에 대한 사회 전반의 고민과 개선 노력이 이어질 수 있는데, “대다수 한국 남성들은 성차별이 작동한다는 의식이 없기”(링크) 때문에 대체 어디서부터 싸워야 할지 더 막막한거죠.

 

“표현의 자유는 보편적인 권리가 아니라 보편성을 향한 권리다”

존엄을 말하는 이 사회의 감각이 숙성되어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 같고,  ‘여론’을 누르고 어떻게든 차별금지법이 먼저 제정되어서 혐오 발언을 함부로 내뱉고 “입만 열면 권리 타령”1하는 사람들 혼쭐이 좀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입니다. 참여자의 변화가능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인권교육가의 자세와 어울리지 않는 생각일까요. 왜 누군간 말할 때 더 조심하고 검열하며 심지어 문제제기도 상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며 하길 요구받는데 다른 누구는 그냥 내뱉고 다리 뻗고 잘 수 있는지, 분노와 무력감이 번갈아 들거든요.

“표현의 자유는 태생적으로 보편적이지 않았다. 약자를 위한 ‘편파적인’ 권리였다”(정희진)는 문장이 주는 후련함이 있더라고요. “인종, 젠더, 계급 간의 위계에서 약자에 대한 강자의 표현의 자유는 혐오 범죄일 뿐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잘 듣고 공감할 수 있는 것, 관계에서의 맥락과 위치 차이를 읽어내고 인정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게 과연 교육으로 가능하긴 한걸까 하는 생각도 늘 한켠에 들지만, 더 현실적인 고민이 있다면 그건 인권교육 자리에서 듣고 싶지 않은 차별적 발언이 나왔을 때 내 말을 삼킬 때와 짚어줄 필요가 있는 지점에 대한 명민한 판단, 해석의 종결이 아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 적절한 질문을 떠올리는 게 내 깜냥으로 될까 그런 생각들입니다. 참여자를 존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말은 ‘표현의 자유’로 용인될 수 있는게 아니라는 타협불가능한 지점에 대한 감각을 ‘가르치지’ 않으며 나누는 방식에 대한 고민과 노력은 좀 더 해보는 것으로…

*작성: 날맹(상임활동가)

 


1. ‘rights talk’. 권리를 권리의 관계성에서 사유하고 실천하는 게 아니라, ‘내 것 챙기기’에 몰두하는 태도를 비판한 의미로 쓰인 말을 류은숙 활동가가 번역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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