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한문장]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죽을까 봐 두려워서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죽을까 봐 두려워서입니다.

지난 2월,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죽을까봐 두려워서입니다.”라고 말을 시작했던 사람은 한 간호사입니다. 폭력적이고 비인간적 노동 환경을 비관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박선욱 간호사 사망사건의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한 집회에서였습니다. SNS를 통해 이 말을 접한 저는 ‘죽을까봐 두려워서’라는 간호사의 말에 관심을 갖고 병원에서 늘 만나던 간호사들의 삶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살인적인 노동환경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한 간호사가 많게는 30명까지의 환자를 돌보며 서로 다른 질환의 복잡한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하다가는 큰일나겠다’라는 위기감을 견디며 여럿의 생명을 책임진다는 무게로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간호사뿐만이 아니라는 것도 새삼 생각했습니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 이러다가 정말 잘못 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그저 견디고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아야 하는지도.

저는 제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고백을 이어가다가 왜 이자리에 나오게 됐느냐는 뉴스 앵커의 질문에 “저는 제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라고 말한 사람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을 폭로한 김지은 씨입니다. 자신의 피해 사실이 알려진다면 한 사람의 권력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어 외려 자신이 위험해진다는 사실, 그 사실이 자신을 두렵게 만들었다는 말씀이었겠지요. 이 말에 담긴 두려움을 공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더 슬펐습니다. 그리고 같은 두려움이 사실은 일상에 곳곳에 있다는 것, 그것을 나도 느끼면서도 견디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상기했습니다.

고통에도 목적이 있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리베카 솔닛은 그의 에세이집 ‘멀고도 가까운’에서 한센병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병은 신경을 짓눌러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게 만들 뿐이고, 그렇게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면 환자들은 그 부위를 돌보지 않게 된다. 피부를 상하게 하는 것은 병이 아니라 환자 본인이다. 스스로가 제 손가락과 발가락, 발, 손을 베이고, 화상을 입고, 멍들게 하고, 벗겨지게 하다가, 결국 그 부위를 잃게 되는 것이다. 고통에도 목적이 있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도 않는다.'”

고통을 말하는 이들이 있어 그래도 그나마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봅니다. 견디고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까스로 유지되어 가고 있는 이 세상을 그나마도 유지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이들은, 사실은,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고통을 느끼고, 그 감각을 세상에 알려준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이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이상 안 들리는 날이 오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목소리를 듣기 싫어 귀를 틀어막고 그래서 결국은 아픈 부위 하나하나를 멍들게 하고 화상을 입게 하고 잃어가는 비극을, 다시는 겪지 않을 수 있다면 하는 꿈을 꾸어봅니다.

*작성: 두리번(활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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