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의 채식 입문기] 2. 생각

[글쓴이 주] 2019년 1월 채식을 결심했습니다. 이 글은 초보 채식인으로 만난 일상의 한 장면, 고민의 한 조각, 가끔씩은 맛나는 레시피로 채울 예정입니다. 올 상반기 월 1회 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광활한 식재료의 세계, 분류법이 시급합니다.]

나는 계획 없이 잘 움직이지 않는 편이다. 움직이는 것이 귀찮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수학을 좋아한다. 군더더기 없이 논리적으로 정리된 풀이 과정을 보면 기분이 좋다. 여하튼 나는 한 끼를 만들어 먹어도 조리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동선을 시뮬레이션 한 후에 시작하고, 집 밖을 나갈 때도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못 견디기에 갈만한 곳을 마음속으로 정리한 후에 나간다. 전자제품을 하나 사기 위해 온갖 구매 후기를 다 읽어보고, 설명서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정독 후에 전원을 켠다(실행하다 다시 설명서를 뒤적이는 것은 참을 수 없다!).

그런데 남은 인생의 식습관을 너무 계획 없이 결심했다. ‘계치멸바어’ 이러면서 대강 시작해버렸더니 식재료의 다양함에 뒤통수를 제대로 맞고 있다. ‘치즈를 먹기로 했는데 우유나 요구르트는? 생크림 케이크는…’, ‘바지락과 오징어, 새우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묵을 먹기로 했지만 참치김밥은 안되겠지? 그럼 맛살은?’, ‘계란이 들어간 마요네즈를 먹는 건?’ 뭔가를 입에 넣으려고 할 때마다 버퍼링에 걸린 것처럼 정지 상태가 온다.

 

[나의 식사 기준을 돌아보았습니다.]

‘칼로리/가격/기분, 이 세 가지 중 적어도 하나는 충족할 것’이 자취를 시작한 후 나의 식사 기준이었다. 채식을 시작하며 많아진 생각을 정리하려면 이 기준부터 돌아보는 것이 필요했다. 나는 대체로 가격이 맞으면 먹었고, 가격이 적절해도 칼로리가 많아 살찌는 게 걱정되면 회피하기도 했는데, ‘기분’이 일 순위가 된 날은 모든 회로를 정지시키고 먹었다. 나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빠른 위로가 사 먹는 음식인 삶을 살아왔던 거다. 사실 이 위로가 아주 강력하고 즉각적이긴 한데, 어느 정도 충족된 후에 정신을 차리면 위로받은 시간보다 길고 집요하게 ‘가격’과 ‘칼로리’의 공격을 받는 경우가 허다해서 효율이 0으로 수렴하는 위로이기도 했다.

여기 쓰기에는 망설여지는 과거에 대한 반성(?)의 시간이 지나고, 기준을 다시 설정할 시간! 임금협상은 좀 어렵고, 내 몸에 대한 인식을 단숨에 바꾸는 것은 더 어려우니, 그리고 셀프 토닥토닥도 필요하니까 ‘가격/칼로리/기분’을 폐기하는 대신 상위 기준으로 채식을 설정했다. 한 무더기의 얽힌 생각들을 거쳐 깔끔하게 위에 한 줄 얹었다. 그래! 이게 정리의 맛이지!

순서도

<음식을 입에 넣기까지의 사고 흐름도>

상위 기준을 설정했지만, 현실을 위한 식재료 분류법은 필수이다. 이 분류법을 얼마나 정교하게 만드느냐가 나의 채식 라이프에서의 버퍼링을 줄여줄 것이다. 지금까지 정리한 기준은, ‘척추동물은 먹지 않는다’이다. 이러면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에 속하는 동물이 제외된다. 이제 다양한 상황들을 상상해보고 예외 상황들을 구성해본다. 척추동물인 멸치는 (처음에 정한 예외로 두는 이유에 따라) 피할 수 없다면 먹되 찾아먹지는 않는다. 바지락과 새우, 오징어 등의 무척추동물과 생선이 주된 재료인 가공품들은 피할 수 없다면 먹는다. 조류의 알과 포유류의 젖(가공품 포함)은 먹되 즐기지 않는다.

 

[버퍼링이 짜증 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대책 없이 시간만 흘러가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성향 상 ‘채식을 하겠지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까지 뭘 먹을까 이것저것 따지지는 않겠다’는 비공개 행동 지침을 정해 놨었다. 나 좋자고 하는 일을 괴로워하며 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다행인 건 판단하느라 멈칫거리며 지연되는 시간이 괴롭지 않다는 점이다. 솔직히 말하면 괴롭지 않은 게 아니라 재밌다. 완벽하게 실행하기 위해 아주 꼼꼼히 계획을 짜는 기분이다. 완벽한 밀실 살인을 위해 평생을 바치는 추리 소설 속 범인의 마음 같다면 이해가 되려나?(예가 적절하진 않지만 느낌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멈춤 없는 삶은 누군가의 어려움을 못 보고, 고민을 못하고, 그래서 더 나아질 수 있는 기회를 못 갖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니 이건 아마도 새로 고침 할 때마다 기다리는 버퍼링의 시간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더 신난다. 지연되는 시간이 아니라 변하는 시간이니까. 예상했던 것과 다른 상황에 마주치면 또 버퍼링이 오겠지만. 그럴 때는 ‘안녕? 새 데이터. 잠깐 기다려. 네가 들어갈 공간을 정해줄게. 없으면 만들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러면 될 일이다.

 

[생각이 확장되어 갑니다]

즉흥적으로 아침에 눈뜨며 결심한 채식이라 그런지 매일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다. 알고는 있었지만 공감은 안됐던 상황들이라던가, 아예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하나의 장면으로 구성된다던가 하는 것이 그런 것들이다. 앞에서 ‘척추동물을 먹지 않겠다’고 정해놓고, 기준 밖의 무척추동물과 동물이 아닌 계란과 우유 등을 먹는 것을 망설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양이는 귀엽다’, ‘덥고, 춥고, 숨 막히는 게 싫다’ 정도인 나에게 채식은 좀 더 많은 것을 아는 것이 어떠냐고 묻는다. 누군가는 채식을 하면 밥 먹는 하루 세 번 자신의 신념을 확인하게 된다고 하는데, 점심을 먹으며 저녁 뭐 먹을까를 고민하는 나는 그 빈도가 더 많은 것이다.

좋아하는 젤리의 젤라틴이 돼지에서 왔다는 것, 탱글 촉촉해 보이는 타이거 새우가 필리핀의 맹그로브 숲을 망가뜨리면서 양식이 되고 있다는 것, 마음에 든 운동화가 소가죽 패치를 썼다고 광고하니 못 사겠고, 위시리스트에 넣어놓은 간절기에 덮기 딱인 구스 이불을 리스트에서 삭제하는 것 같은, 먹는 것에서 시작한 것이 먹을 수 없는 물건들에서도 다른 면을 보게 한다. 그냥 봤을 때는 거창하고 멀리 있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내 곁에 있는 소소한 것과 만난다는 걸 체험한다. 원한 것이든 원하지 않았던 것이든 이렇게 만난 것들을 피하지 않고 바라볼 것이다. 이런 만남이 모여 내 삶의 태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될 테니까.

 *작성: 햄(활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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