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살짝쿵] 양치기 소년은 정말 거짓말을 한 걸까?

얼마 전 공동육아를 하는 부모와 교사 대상의 시민인권교육에 참여자로 함께 했다. 강사는 우리가 어렸을 때 많이 들었던 ‘늑대와 양치기 소년’ 이야기를 소재로 알쏭달쏭 인권을 풀어냈다. 참여자는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이 떠오른다고 했다. 거짓말을 반복해서 하니 아무도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양치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거짓말은 진짜 거짓말이었을까? 우리는 그동안 ‘거짓말’에 속아, 화가 난 ‘마을어른’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세상 모든 어린이들이 새겨야 할 교훈으로 생각해 왔다. 양치기 소년은 양들을 지키는 도구로 인식되고 양치기 소년의 태도에 대한 평가와 교훈으로 기억된다. 그동안 ‘거짓말하는 양치기’가 아닌 혼자 양들을 지키던 ‘양치기 소년’을 떠올려 보기가 쉽지 않았다.

주변에서 흔히 비슷한 말을 듣는다. ‘게으르면 안 돼’, ‘놀면 안 돼’, ‘뛰면 안 돼’, ‘더러우면 안 돼’, ‘숙제 안하면 안 돼’, ‘질서 안 지키면 안 돼’, ‘도둑질을 하면 안 돼, 그럼 낙오자가 돼’, ‘법을 안 지키면 경찰이 와서 잡아가’, 이런 말들은 아무리 좋은 교훈을 주어도 단서가 있는 공포가 되고 협박이 된다. 양치기 소년의 입장에서 공감과 사고로 이어지기보다는 주어가 국가나 기관 입장으로 굳어져 버린다. 사회의 여러 현상에 대해 입장을 이해하고 사고하기 보다는 스스로 낙인을 만들고 그럼 어떤 처벌을 받을 거라는 두려움을 먼저 익힌다.

양치기 소년은 왜 거짓말을 했을까?

심심해서 그랬겠지, 양치기는 어린이였을 텐데 정말 심심했겠다. 아니, 심심했던 게 아니라 어린이가 일을 해서 힘들었던 것은 아닐까? 누군가 양치기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았을까? 그런데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늑대가 나타났던 건 아닐까? 늑대가 나타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라는 건 가르쳐주지 않았나? 늑대가 나타날지 모르니 넌 거기에 있으면 안된다는 이야기는 왜 아무도 해 주지 않았을까? 양들만 재산으로서 중요하고 양치기는 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을까? 양들과 양치기까지 보호해 줄 수 있는 그런 환경이 필요하지는 않았을까? 양들이 위험해진다면 양치기 소년은 이미 더 위험해지는 것은 아닐까?

양치기 목동은 어떤 존재일까? 어린이지만 양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이고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늑대가 오는지를 잘 관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양들의 위험에 대해 민감했을 것이고 누구보다 늑대가 오는 소리와 감각을 빨리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양들을 지키기 위해 위험에 빠지기 전에 소리를 쳤을 것이다. 어른들은 한참 일을 하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반복되는 소리를 듣고 일이 중단되는 것을 좋아할 리는 없다. ‘늑대가 나타났다’ 라는 신호를 듣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늑대가 보이지도 않는데 하던 일을 방해하니 양치기 소년에게 거짓말 좀 그만하라고 핀잔을 주었을 것이다. 이런 양치기소년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 하다 참여자 한분은 불현 듯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양치기 소년은 얼마전 돌아가신 김용균님이었을지도 몰라요”

사고가 나기 전에 누구보다 먼저 위험을 인지하고, 사고가 날 수 있다고 외쳤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이제 그만 외치라고 핀잔을 주거나 거짓말 하지 말라고 무시한다. 김용균님은 계속 말을 했고, 글귀를 써서 들고 있었고, 내 말을 들어달라고 외쳤다. 그러나 아무도 김용균님의 말에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김용균님은 양들보다 먼저 늑대에게 먹히고 만다. 양치기 소년이 죽고 양들이 몰살을 당해야만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닌 참말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일까? 거짓말이라고 규정지은 다음 은폐되는 진실은 무엇일까? 양치기 소년을 위험한 늑대가 나타나는 환경에 놓이게 한 사람들은 누굴까? 거짓말 하지 말라고 야단치는 어른들 사이에 양치기소년을 대변하거나 보호해줄 사람이 있었을까?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하면서 입 다물게 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기 위해서였을까?

거짓말 하지 말라는 경고 뒤에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지지만 그 말을 함께 논의하고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 외침은 들리지 않는 소리가 될 뿐이고 양치기소년 뿐만 아니라 양들은 모두 죽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 역시 늑대로 부터 안전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어쩌면 늑대보다 더 위험한 것은 양치기의 태도에 대한 경고를 하고 그 질서를 계속 유지하고 싶은 누군가가 아닐까? 지금도 태안화력발전소에서는 또 다른 ‘김용균’이 죽어가고 있다. 지금도 미투를 한 사람이 2차 3차 가해를 당하고 있다. 심심해서 촛불을 드는 사람은 없다. 심심해서 미투를 하는 사람은 없다. 심심해서 피켓을 들고 미세먼지 속에서 하루종일 서 있는 사람은 없다. 양치기소년도 심심해서가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외쳤을 것이다.

2019년1월24일 열린 태안화력발전소인권실태조사보고회 웹자보 일부 이미지입니다

소리나지 않는 외침도 들려진다면

사실은 토론 과정에서 “양치기 소년, 하니까 김용균님이 생각났어요” 라는 말을 듣고는 말을 한 사람도, 듣는 사람도 갑자기 울컥 했다. 그래서 아무 말도 나누질 못했다. 그 무거움에 갑자기 만난 진실 같은 엄중함에 아무 말도 못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서도 그 말은 내 주변을 서성인다. 누군가 소리 내어 외치지 않아도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몫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어둠 속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노숙인들, 지하철에서 자리 욕심만 내는 노인들, 식당에서 뛰어다니는 어린이들, 카페에서 아기의 기저귀를 갈 수 밖에 없는 엄마들, 모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의 소유자들이지만 왜 그랬는지, 그 비난 받을 행동을 한번 들여다 볼 수 있었다면 세상의 양치기 소년들은 외롭고 두렵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더 당당하게 위험 신호를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을 것 같다.

교육에서 교훈을 준다는 것

인권교육에서 가끔 ‘당신은 가해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듣는 분들이 불편해 하는 경우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동등하고 존엄하다’는 선언이 인간은 존엄하니 훼손하지 말라는 지시나 경고로 들려지고, 존엄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비인권적이라고 느껴지는 교육은 모두를 가해자로 만들고 불편하게 할 수 있다. 거짓말 하면 안된다는 양치기 소년의 우화처럼 당신도 거짓말 하는 양치기 소년이 되지 말라는 교훈이 협박이나 경고로 들리기 때문이다. 교육에서 입장을 떠올리고 공감하기보다 교훈을 주는 것은 역효과가 날 수밖에 없다.

‘늑대와 양치기 소년’을 통해 거짓말 하면 안된다는 교훈을 주는 대신, 소년이 거짓말쟁이라고 비난 받을 때, 그 몸과 마음이 어땠을지를 가늠해 보는 것, 어느 때 존엄이 훼손되는지, 당장 내가 양치기 소년의 훼손된 영혼이라면 인간의 존엄에 대한 의미는 스스로 느끼게 된다. 그래서 ‘김용균님의 훼손된 영혼과 육체는 바로 나다’ 라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있다.

*작성: 사슴_김혜은 (활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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