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의 채식 입문기] 1. 시작

[글쓴이 주] 2019년 1월 채식을 결심했습니다. 이 글은 초보 채식인으로 만난 일상의 한 장면, 고민의 한 조각, 가끔씩은 맛나는 레시피로 채울 예정입니다. 올 상반기 월 1회 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고기를 그만 먹어도 될 것 같아서 채식을 시작했습니다]

태어난 순간 ‘응애~’ 대신 ‘고기~’하고 울지는 않았겠지만, 하루 세 번 뭘 먹을까에 대한 뇌지도를 그려본다면 상당히 눈에 잘 띄는 위치에 고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만한 사람이 나였다. 식사 중 한 끼는 질이 좋던 나쁘던 거의 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먹었고, 고기가 들어가지 않았는데 비싼 음식을 사먹게 될 때면 다른 대체 메뉴가 없을까 한 번씩 더 고민했었다. 그러다 2019년 1월 1일 아침에 눈을 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은 인생은 고기를 그만 먹어도 되지 않을까? 충분히 먹은 것 같아.’ 그리고 채식을 시작했다.

보통 함께 육식을 즐겨왔던 사람이 채식을 시작한다고 하면 무슨 이유로 시작하게 됐는지 물어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보통의 대답을 떠올려보면 동물권을 위해, 환경을 위해, 몸을 위해 시작했다는 답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더 이상 먹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먹었으니 그만 먹어보자는 생각으로 채식을 시작한다고 말하려니 참 없어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떤가? 대학시절 제국주의, 석유 자본주의 등등을 거론하며 이라크 전쟁을 반대한다는 선배들에게 ‘사람들이 죽는 게 싫어서 이라크 전쟁을 반대해요.’ 라고 말해서 그게 뭐냐는 눈총을 받았던 나인데 뭐. 의미부여를 하며 하는 행동도 있겠지만, 실천이 모여 의미가 되기도 할테니 일단 시작하는 거지.

[저는 계치멸바어 채식인입니다]

여튼 결심은 했으나 비건(완전 채식인)이 되는 일은 이상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식사를 내 이상에 맞추려면, 돈이나 시간, 혹은 둘 다, 어쩌면 아내나 엄마가 필요한데 나는 다 없고, 현실의 벽이 높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자유도가 높지 않은 내 식생활을 살펴보면, 일주일 중 직장에 나가는 5일간 사먹는 밥은 평균 8끼, 메뉴는 ‘한○도시락’이나 편의점 샌드위치나 김밥, 컵밥이 90%이상. 이런 현실에서 계란, 치즈, 멸치, 바지락, 어묵은 내가 제외할 수 없는 식재료였다. 요 기준에 따라 한○도시락의 열무비빔밥과 감자튀김, 이○토스트의 감자토스트, 편의점의 딸기 샌드위치, 김○천국의 비빔밥과 국수류, 몇몇 찌개류가 살아남았다. 그리고 ‘고기랑 햄을 빼고 해주세요~’라는 주문으로 김치볶음밥과 기본김밥을 추가로 얻었다.

그래서 나는, 페스코(해산물까지 먹는 채식)보다는 먹는 종류가 적지만 락토오보(계란과 유제품은 먹는 채식)보다는 종류가 많은, 카테고리 어정쩡한 ‘계치멸바어 채식인’이 되었다.

[채식을 시작했다고 주변에 말해보았습니다]

1월 2일 출근해서 바로 채식을 시작했음을 알렸다. 약간의 곤란함이 담긴 표정,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이후 돌아온 대답은 ‘그럼 신년 회식은 어디서 해야하죠?’였다. 그리고 그나마 긍정적인 말투로 ‘살은 빠지겠네요.’라는 추가 발언을 들을 수 있었다. 하긴 지난 주까지 회식 메뉴로 양꼬치나 주꾸미 삼겹살 볶음을 먹으러 가자고 했던 인간이 갑자기 채식한다고 하니 충분히 당황스러울만 하다. 게다가 먹을 만큼 먹어서 그만 먹는다는 이유라니… 가족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설날 갈비찜과 쇠고기 떡국의 간보기를 사양하자 시어머니가 섭섭해 했고(이후에 배신이라고 하셨다 ㅋㅋㅋ), 이미 10년 이상 채식을 하고 있는 남편도 자기 때문에 귀한 딸이 고기를 못 먹게 됐다고 장모님께 타박을 듣지 않을까를 먼저 걱정했다(물론 그 뒤에는 응원해줬다). 그나마 간만에 만난 친구들의 반응이 제일 나았다. 무반응, ‘응, 그래.’

[삶이 드라마틱하게 변하지는 않습니다만]

간헐적 단식을 해 볼까 하다가 먹는 즐거움을 하루에 한 번만 가질 자신이 없어 시작도 전에 접었을 만큼 나는 먹는 행위를 좋아한다. 채식을 시작하면서 이 즐거움이 줄거나 늘었을까? 아직까지는 아니다. 설날 잔뜩 받아온 나물 반찬이 많아서, 이후 일주일간 직장에서 식사 메뉴를 고를 때 비빔밥을 선택하기가 망설여졌던 걸 빼고는 큰 고비는 없었다. 고기가 들어가나 안 들어가나 사먹는 메뉴가 주는 충족감의 크기는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오히려 선택지가 축소되어 선택의 고민이 줄어들었고, 한○도시락을 먹을 때마다 들던 정의하기 어려운 자괴감도 없어졌다.

이제 겨우 두 달이 지났다. 채식하는 사람과 10년을 만나왔지만 막상 내가 채식을 하니 마음이 또 다르다. 글을 쓰면서도 이 글을 읽어주실 분들에게 뭘 남기고 싶은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큰 뜻 없이 시작한 채식이라 그런가보다. 하지만 글 처음에 썼듯이 올해 내가 나눌 글들이 모이면 어떤 의미가 될 거라 기대해보며,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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