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살짝쿵]재산권은 인권이 될 수 있을까?
- 헨젤과 그레텔이 마녀의 과자집을 먹은 것은 재산권의 침탈?

인권감수성 교육을 진행할 때 익숙한 동화나 옛이야기를 가지고 인권의 눈으로 다시 톺아보는 시간을 갖곤 한다. 최근 한 인권교육에서 ‘동화 속 인권 찾기’로 첫시간을 열었던 적이 있다. 이 방법론을 가지고 진행하면 대체로 참여자들이 인권의 문제로 찾아내는 이야기들은 엇비슷하다. 일테면 심청전에서는 젊고 어린 여성을 용왕의 제물로 받치는 것이라던가, 결국 용왕에 눈에 들어 신분이 상승하도록 여성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 눈을 뜬 심봉사를 통해 장애극복의 서사를 강조한다는 비판의 소리들이 나온다. 그럼에도 이번 참여자들이 찾아낸 것은 좀체로 드문 케이스였다. 이 날의 주문은 동화 속에서 인권침해의 다양한 장면들을 찾아보고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이라 여기는 것을 상황극으로 구현해달라는 것이었다. 한 모둠에서 <헨젤과 그레텔>을 가지고 표현했다. 아이들을 버린 것에서 아동학대의 이야기, 마녀 혹은 계모를 사악하게 그리는 방식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 조장이라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가장 대표적인 인권침해로 꼽아서 상황극으로 표현한 내용은 마녀의 집을 먹은 헨젤과 그레텔의 행동이 타인(마녀)의 재산권에 대한 침해라는 것이었다.

 “왜 이 장면을 고르셨어요?”

“마녀만 나쁘다고 나오는데, 우리는 다른 관점에서 봤어요.” “다른  건 많이들 찾을 것 같은데…하하.. 이런 건 새롭지 않나요?”

“마녀의 집이 과자인데 그럼 아이들이 안먹겠어요? 너무 배고픈 아이들을 시험에 빠지게 한 한 것 아닌가…”, 모둠의 발표를 보던 다른 참여자의 발언이다.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해도 남의 집을 먹는 것은 엄밀히 재산권 침해지요”

난감했다. ‘재산권’을 인권으로 다뤄야 하나. ‘정당한’ 재산권 집행이라는 이름으로 삶의 터전에서 내쳐지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고 있는 현실임에도, 심지어 교육에 참여한 이들 중에도 처내기보단 내쳐질 처지에 가까운 사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이들은 누구의 언어로 ‘무엇을’ 문제라고 보고 있는가.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유행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보니 우리는 이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재산권 옹호론자가 되고 있는 것인가.

   “임대료 인상 문제로 갈등을 빚어온 건물주를 둔기로 폭행한 혐의로 서울 종로구의 유명 족발집 사장 0모씨가 구속됐습니다. 서울중앙지법은 “범죄사실이 소명되며 도주의 위험이 있다”며 0모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습니다. 0모씨는 건물주인 X모씨에게 둔기를 휘둘러 다치게 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2016년 건물을 인수한 X모씨는 보증금과 임대료 인상을 요구했지만 0모씨가 받아들이지 않자 가게를 비워달라는 명도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후 12차례 법원의 강제 집행을 0모씨가 물리력으로 막아내며 충돌이 반복돼왔습니다.” – 연합뉴스TV  

너무나도 익숙한, 너무나도 너무한(!!) 뉴스의 단골멘트다. 뉴스는 ‘정당한’ 재산권을 행사하는 임대인을 향해 ‘막무가내’로 재산권을 침해한 임차인이 결국 폭행을 저지른 논조로 말하고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임대인의 권리만 이야기하는가. 임차인의 폭행은 국가가 개입할 문제고, 임대인의 재산권은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것은 왜 당연하게 여기는가(개입하지 않는 식의 개입으로 재산권을 지켜주고 있는 것이지만). 이렇게 구분 짓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런데 아이들이 마녀의 집을 먹는 것이 마녀의 재산을 침해한 인권침해라고 본 참여자들의 감각이 사실상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이 사회의 감각이라는 것을 어쩌랴.

임대인의 무차별 권력행사

“그럼, 재산권은 인권일까요?”

“……???” 잠시 침묵이 일고, 세계시민교육을 받고 오신 참여자 한분이 “세계인권선언에도 나오던데요”라며 전에 들었던 기억을 떠올리신다. 

“네 맞아요. 선언 제17조는 재산권 조항으로 사람은 누구나 혼자 또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재산을 가질 수 있고 재산은 함부로 빼앗기지 않는다라고 적혀있지요.”

그제야 기억이 떠오른 다른 참여자들도 선언에도 있다니 “이것은 왜 인권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그렇다. 왜 인권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간과해선 안될 것은 선언은 어디에서도 재산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선언을 만든 사람들의 재산에 대한 생각은 논쟁하며 계속 변해왔다. 재산을 무엇으로 보고, 어떤 재산에 대해 얼마만큼 제한을 두어야 하느냐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논쟁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명시적 문구가 없다 해도 선언이 말하는 재산은 오로지 인간의 존엄성 실현에 필수적인 물질적 재화를 누릴 권리로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이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인권의 의미가 무엇인가부터 다시 질문을 되돌려 ‘재산’의 의미를 같이 정리해 나갔다.

인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존귀하며 존엄은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것이라는 공통의 감각이다. 인권의 역사는 “이것이 과연 인간다운 삶인가?”라는 외침을 통해 인간 존엄의 의미를 확장해온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인간의 존엄은 사적 이윤 추구의 권리에 치여 보이지도 않는 저 구석에 내몰려 있다. 이것은 단순히 제도적인 처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 안에서도 그렇게 작동한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감각은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끊임없이 재구성되어야 할 ‘사회적 감각’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윤’에 밀려 처참하게 내버려진 존재의 ‘훼손된 존엄’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감각을 되찾아야 한다.

강제집행대신상생
<헨젤과 그레텔>에서 마녀(자본)가 헨젤(노동자)의 살을 찌워서 잡아먹으려는 계략(착취)이 배고픔으로 숲속을 헤매던 아이들이 과자로 만든 집을 발견하고 먹는 장면보다 더 문제적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길들여진 감각 탓은 아닐까.
인권감수성을 되찾는다는 것은 어떤 문제 자체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문제가 진짜 ‘무엇’이 문제인지, ‘누구’에게 문제인지를 보는 감각을 갖는 것이다. 한편, 아이들이 과자집을 먹는 것이나 마녀가 헨젤을 잡아 먹으려 했던 것도 인구위기와 경제위기가 정점에 달했던 17세기 유럽의 굶주림 시대의 모습을 반영하는 서사일 수 있다([인권교육, 살짝쿵] 마녀의 집은 왜 과자로 만들어졌을까?)고 하는데, 그렇다면 <헨젤과 그레텔>의 이야기는 ‘누구’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보아야 할까.

 

– 정주연(루트),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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