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살짝쿵] “저는 여성이고 성소수자인데, 제 인권을 반으로 자를 수 있습니까?”

미국 드라마 오렌지이즈더뉴블랙 포스터

 

수감자, 교도관 인권의 상호연결성

“살인, 강간을 저지른 자에게도 인권이 있는가?” ‘모든’ 인간의 존엄을 말하는 인권교육에서 참여자들이 종종 제기하는 질문이다. 한번은 교도관을 남편으로 둔 학교 선생님이 요즘 감옥 인권 때문에 교도관들이 힘들다며, 재소자 인권만 아니라 교도관들의 인권도 중요하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재소자들이 자꾸 인권위에 진정을 내는 것도 자기 권리라고 해서 교도관들이 피곤하다는 취지의 이야기였다. 학생인권 때문에 교권이 침해된다는 얘기까지 하진 않으셨지만 아마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단 짐작이 들어 그분께 죄송하긴 하다.

교도관 남편 이야기에 영등포교도소의 유명한 ‘코걸이’ 아저씨 생각이 스쳤다. 자기는 ‘죄수복’으로 한복을 입던 때도 징역을 살았다고 말하는, 나를 아들 같다고 챙겨주는 분이었다. 그와 인간적인 정이 쌓인 것도 없진 않았겠지만 결국 그의 ‘챙김’은 나의 ‘구매력’과 교환되는 가치였다는 걸 나중에야 깨닫게 해준 사람이었다.

그의 ‘죄질’은 가석방을 기대할 수 없는 종류였고, 따라서 교도관들에게도 꿀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관철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재량’에 달려있는 가석방 제도의 특성상 조금이라도 일찍 출소할 가능성을 기대하는 재소자들은 교도관의 비위를 거스르는 행위를 삼간다. 법대로 하면 오히려 더 열악한 처우(가령 “온수 샤워는 주 1회”)에 노출된 수감자들은 식수를 끓이는 온수통 물로 매일 씻을 수 있도록 눈감아 주는 교도관의 ‘자비’ 혹은 ‘유드리’를 얻기 위한 (감정) 노동을 한다. 이런 조건에서 인권침해 진정서를 작성한다는 건 이후 많은 걸 포기할 각오가 되어있거나 더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 가능한 일이 된다. 교도관 입장에서 가석방이라는 갑질의 도구가 통하지 않는 그 아저씨는 분명 부담스러운 존재였고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수용자였다.

하루는 아저씨가 나에게 정보공개 청구 매뉴얼을 쥐어주며 하나 써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 매뉴얼이 천주교인권위 자료였는지 양심수후원회 자료였는진 기억이 가물하다. 무엇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아저씨가 정보공개청구로 ‘코를 걸어’ 치과 외부진료를 기어이 따냈다는 사실이다. 잇몸이 아프다고 보고전을 냈지만 약만 돌아왔고, 본인 생각에 외부진료를 한번 받고 싶은데 의무과에선 들어주지 않았다. 첫 번째 정보공개청구가 기각되어 돌아왔고, 이의신청서를 작성해드렸더니 서면 답변 대신 드디어 담당 직원이 찾아와 물었다. “ooo씨, 원하는 게 뭐요?”

교도관 인권을 말했던 그 선생님에게 차마 내 경험을 말할 순 없었고, 장애인 생활시설 사례에 빗대어 “이용인들의 처우가 열악한 곳일수록 종사자들의 처우 또한 열악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로 인권의 상호연결성을 짚고 넘어갔다. 다행히 선생님도 고개를 끄덕이셨던 것 같다.

‘코걸이’ 아저씨에게 밉보이면 나도 ‘또박 타겠구나(상호 신뢰를 철회한, 서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는 뜻)’ 두렵긴 했지만, 같은 방을 쓰며 옆에서 지켜본 바 그는 아무에게나 자기 기분 내킬 때 코를 거는 사람이 아니었다. 외부진료를 요구하는 그가 어떤 교도관들에겐 떼쓰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나 아저씨에겐 빈부에 상관없이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해달라는 정당한 요구였다. 정보공개청구를 받은 직원들도 피곤했겠지만, 아저씨는 뭘로 정보공개청구를 걸 것이며 나에게 할 부탁의 거래물을 떠올리느라 마찬가지로 피곤했을 것이다. 반대로 모두에게 적절한 의료권이 보장된 상황이었다면 생뚱맞은 정보공개청구에 응해야 할 일도 줄테니 교도관의 인권 또한 나아질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차별의 교차성 – 수감자라고 다 같은 수감자가 아니다

수치심과 모욕감을 유발하는 수용시설 내 규율에 복종할 것을 요구받는 위치에 있는 재소자들의 약자성을 부각할수록 감옥인권의 정당성은 말하기 쉬워진다. 그러나 약자라는 위치성은 맥락과 구체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점 또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피해자의 위치에 서서 ‘네 인권만 인권이냐 내 인권도 인권이다’ 외치는 교착상태에 빠지고 만다. 누가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는가란 질문에 대해 소수자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이 쉬운 접근이지만 해당 집단 안에서 또 다시 교차하는 소수성 속에 차이가 만들어진다는 점을 놓쳐선 안 된다. 노역수, 성소수자, 장애인은 같은 재소자 안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자리한다. 이명박근혜는 현재 수인(囚人) 신분이지만 교도소장보다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명박근혜는 감옥인권이 아니라 특권을 누리고 있고, 소수의 부당한 특권이 아닌 평등한 감옥 인권을 보장할 때 교도관들의 수발 노동 또한 줄어들 것이다.

내가 <슬기로운감빵생활>을 재밌게 봤다는 걸 들은 친구가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을 알려줬다. 미국의 여성 재소자들이 주인공인 드라마이다.

극중에 한번은 재소자 대표를 뽑는 선거를 둘러싼 풍경이 등장한다. 트랜스젠더 재소자는 자신이 당선되면 호르몬제 지급을 비롯한 의료권을 개선시키겠다고 말한다. 다른 재소자는 피자와 치킨을 더 자주 먹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운다. 또 어떤 재소자는 자신의 종교모임에 대한 지원 확대를 요구하겠다고 외쳤다. 감옥 인권을 꼬집고자 배치된 대사였을까, 한 교도관의 말대로 1년마다 한번씩 돌아오는 선거는 재소자들에게 ‘진짜 권력’을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선거 기간 먹을거리를 풀고 재소자 간의 적대를 적당히 조장하며 더 큰 ‘사고’ 없이 평탄하게 교도소가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통치 전략이었음이 드러나며 해당 에피소드는 끝이 난다.

재소자 대표 선거 장면에는 감옥 인권을 옹호하고자 끌어온 약자로서 수인의 위치성이 어떻게 다시 분화될 수 있는지가 잘 드러난다. 여성 재소자라는 공통점을 무색하게 만드는 집단 내부의 차이들이 등장한 것이다. 보통 미국 내 차별하면 인종을 떠올리게 되지만, 드라마에는 흑인 내부에서도 조롱과 멸시를 받는 트랜스여성(MTF) 흑인이 나온다. 한편, 백인이라고 다 같은 백인이 아니다. 피부색으론 백인의 지위를 가졌을 것 같지만 그 백인 안에서 이주민은 2등 시민이 된다. 다시 이주민 안에서도 차이가 작동한다. 러시아 출신 주방장과 라틴계 ‘신입’은 피부색도 다르고 작업장 내 서열도 다르다. 여기에 종교, 나이라는 차이까지, 여성 혹은 재소자라는 약자 집단 내부에서 횡단, 경합하는 소수성을 분석하는 데 ‘여성 차별’이나 ‘재소자 인권’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단출하고 둔탁한 개념이 되고 만다.

문재인후보국회연설 중 성소수자 기습시위 장면

*사진: 한겨레

“나는 여성이고 성소수자인데, 내 인권을 반으로 자를 수 있는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한 이가 다른 자리에선 동성애에 반대한다고 밝힌 것에 항의하던 활동가의 외침이다. 마치 기계 분해하듯 여성이자 성소수자인 사람의 몸을 갈라내어 여성인권 부분만큼 지지하고 성소수자 부분은 반대한다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인간의 삶은 분절적 소수성으로 설명될 수 없다. 물론 차별에 각각의 이름(성차별, 장애인차별 등)을 붙이는 것은 소수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자기 탓이 아닌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가령 앞서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의 MTF 흑인 미용사가 경험한 모욕적 표현들을 어디까진 인종차별, 여기부턴 성소수자 차별, 이거는 성차별 그리고 나머지는 감옥 인권 이런 식으로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차별의 논리 또한 소수성 사이를 따라 흐르며 작동한다. 청소년 참정권 농성장 주변을 지나는 이들이 많이 뱉은 말 중 하나가 “아직 뭣도 모르는 어린 것들이 선동당했다”였다. 미성숙, 배후설은 권리를 주장하는 소수자들이 늘 받는 의혹이다. 드라마를 보고 잘 모르는 애들이 동성애에 물들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성소수자 혐오발언은 ‘미성숙’하기에 ‘보호’받아야 한다는 ‘청소년 혐오’ 논리에 기대어 작동하고 있다.

소수자로서 단일한 정체성이 아니라 소수성들이 교차한다는 것, 차별의 논리가 다른 소수자 차별 논리와 기대어 작동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이제 차별에 맞서기 위한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된다. 장애인 당사자 교육을 가면 듣기 싫은 말로 “반말 듣는 것”을 자주 꼽아주신다. 반말을 누가 듣는가를 떠올려 봤을 때, 반말을 들은 장애인은 그 순간 어린 존재 취급을 받은 셈이다. 결국 장애인 차별에 반대하는 것은 어린 존재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는 것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여성에게 좋은 것은 성소수자에게도 좋고, 성소수자에게 좋은 것은 여성에게도 좋다”

3.8 여성의 날에 성소수자 단체가 들고 나온 피켓 구호이다. 인권의 상호연결성 그리고 연대의 필요성을 확인하는 교육의 마무리로 가져가곤 하는 문장인데, 저 문장에 동의가 안 된다고 말한 참여자들도 꽤 있었다. 그럴 때마다 성별이분법에 반대하는 것이 왜 여성 인권에 도움이 되는지, 성역할을 비틀어보는 작업이 성소수자 인권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더 고민해주시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이며 아쉬움과 함께 돌아서게 된다.

인권교육에서 차별의 교차성을 고민한다는 것은 여성 인권과 성소수자 인권 혹은 청소년 차별과 장애인 차별을 왜 분리하여 접근할 수 없는지 열심히 설득하는 작업이란 생각이 든다. 동시에 교육가로서 ‘정치적 올바름’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는 태도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특정 존재의 약자성을 절대화하지 않는 것, 관계의 역동이 구성되는 맥락에 주목하되 ‘좋은 게 좋은거다’로 퉁치지 않는 것, 그리고 참여자와 교육가 사이에 흐르는 소수성의 결들을 예민하게 의식하는 것들 말이다.

*작성: 날맹(상임활동가)

차곡차곡 쌓아가는 소중한 문자후원

#2540-5353

문자메시지에 #2540-5353을 입력 후, 응원의 메시지를 담아 전송하면 인권교육센터 들로 3천원이 일시 후원됩니다. 지금 들을 충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