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살짝쿵] ‘노동이 뭐예요?’란 질문을 두려워하지 말자
- 나의 노동을 낯설게 보는 질문을 만날 때

‘근로’를 ‘노동’으로 바꾸자는 개헌 논의가 한창이다. 제헌헌법에 들어 있던 노동이 사라진 지 오래다. 헌법에서만 사라진 게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도 함께 사라졌다. 한순간에 사라진 게 아니라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근로, 노동을 오가면서다. 헌법에 노동을 되살리자는 논의가 노동자 삶의 변화로 나타나려면 노동에 대한 인식부터 변해야 할 것 같다.

교육 중 만나는 참여자에게서 노동에 관한 우리 사회 인식을 가늠할 때가 많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 있고, 나는 노동자가 아니고 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때론 ‘노동자’라 부르는 것이 기분 나쁜 사람도 있다. 한 교사가 화난 듯 했던 말이 가끔 생각난다.

“교사가 존중받고 있지 못하고 있어요. 말로는 선생님을 존경해야 한다 하고, 교사의 권위를 높여줘야 한다 해요. 그런데 교사도 노동자라 하면서 낮춰 볼 땐 이건 뭔가 싶어요.”

교사에 대한 존중은 교사의 수고로움에 대한 존중을 포함할 텐데 교사의 수고로움을 노동으로 부르지 말라니 노동혐오에 가까운 인식 아닌가 생각했었다.

자신을 노동자라 부르는 걸 기분 나빠하는 사람도 세상을 움직이는 노동의 가치에 대해서는 특별히 토 달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본다. 좀 이상한 장면 중 하나다. 내가 어떤 노동을 하는 사람과 거리를 두기 때문인 것 같다. 노동과 근로의 개념을 다룬 짧은 영상을 찾다 보면 등장하는 노동자의 모습이 엇비슷하다. 어둡고 먼지 날리는 곳에서 몸을 쓰고, 땀을 흘리고, 남들이 기피하는 일을 하고, 폭력에 시달리고… 이렇게 대표되는 노동자의 모습을 보며 어렵고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열악한 처지에서 노동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런 마음이 동기가 되어 노동인권 연수에, 청소년노동인권교육 활동가 과정에 참여하는 것도 같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고통을 호소하는 타인을 돕고 싶은 선한 마음이 크게 움직였을 것이다. 가끔 이런 생각도 한다. 나의 노동에 대한 고민은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나 선한 마음과 크게 상관관계가 없는 것 같다는. 나와 노동의 거리가 백만 광년쯤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참여자를 만날 때면 그런 생각이 더 커지는 것 같다.

그러나 때론 그 좁히기 힘든 거리를 조금 줄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때도 있다. 나의 노동을 낯설게 보는 질문을 만날 때다. 의문을 품고 숙성시켜 만든 질문과 생각을 나누다 보면 나 역시 깨닫게 되는 게 많다. 이래서 배움이 일어난다고 하는구나 깊게 이해하는 순간이다.

 

“가사일을 하는 사람도 노동자인가?

내가 집안일 하는 것에 대해 노동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스스로 일하는 것이지 무언가 대가를 바라면서 일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난 노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을 노동자라고 할까? 법에서는 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가 있을 때, 또 돈을 버는 사람을 노동자라고 한다. 사전적 의미처럼 사람이 생활을 위해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해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노동자라 한다.

나는 왜 법과 사전적 의미 안에서 노동자의 의미를 찾으려고 했을까? 내가 배운 교육과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라는 어떤 힘에 의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 같다.”

25년 차 전업주부라고 소개하던 참여자의 생각 나눔의 일부다. 내가 매일 하는 ‘가사일’에서 노동을 발견하는 일, 그간 수동적이고 순응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했던 개념에 의문을 품고 고민을 거듭했을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갔다.

“그런데 오늘 생산의 3대 요소인 토지, 자본, 노동을 생각하며 노동자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 보았다. 내가 자본을, 또는 생산수단을 가지고 생산을 하는 사람인가? 아니다. 난 노동만을 가지고 생산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노동자인 것이다. 이제 청년이, 주부가, 백수가 노동자일 수 밖에 없고 조합 결성을 통해 의견을 표현 할 수 밖에 없다는 실마리를 찾아가기 시작하는 것 같다.”

스스로 노동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일, 노동자임을 선언하며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고백이 낯설지만 반갑다. “조합 결성” 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지 더 나눠보고 싶고 그렇다.^^

 

교육 중간 쉬는 시간에 한 참여자가 나눠 준 생각도 생생하다. 참여자의 특성을 고민하며 준비한 이야기가 잘 전달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듣게 되었다.

“남편이랑 가사노동 분담으로 싸우는 중이에요. 두 아이를 키우며 함께 해야 할 가사노동에 대해 생각이 많이 다른 것 같아요. 나 혼자 동동거리고. 교육 중 ‘집안의 노동자’ 얘기를 들으면서 아, 내가 집안의 노동자였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편한테 책 표지 사진을 찍어 보냈어요. 나, 집안의 노동자라고.”

집안의노동자_책표지

현재 진행 중인 투쟁에서 무기가 될 언어를 발견했다며 약간 상기된 얼굴이었다. 오전 10시에 시작하는 교육시간에 맞춰 오기 위해 두 아이를 깨워 씻기고 밥 먹이고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정신없이 달려왔을 터다. 남편이랑 분담이 되지 않는 일을 혼자 감당하면서도, 오늘은 남편이 일찍 나가는 날이니까 어쩔 수 없었지 생각하다가도, 해결점을 못 찾아 앙금처럼 가라앉은 부당함을 안고 교육에 애써 집중하고 있었을 터다. 그러다 발견한 나를 설명해 줄 언어. ‘전업 주부’, ‘노는 사람’이 아닌 ‘집안의 노동자!’ 가사노동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싸울 힘이 생긴 것 같아 무조건 응원하고 싶어졌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노동’하면 가장 먼저 ‘임금노동’을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종속된 노동 경험을 세포마다 새기고 있는 우리가 이 사회에서 상상할 수 있는 ‘좋은 노동’ 역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제대로 된 대가를 받는 것을 넘어서기 어렵다. 노동을 임금노동에 국한해 정의하는 경우 노동자에 대한 정의 역시 ‘임금을 댓가로 일하는 사람’ 류의 답변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어쩌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여기와 가장 맥락이 닿아 있는 정의일 수 있다.

그러나 노동은 사회․문화․경제적 상황에 따라 자연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모두의 생존을 위해 누구나 해야 할 노동이기도, 누군가의 정치적 행위를 떠받드는 노예의 노동이기도, 시지프스(Sisyphos)의 돌덩이를 올리는 형벌같은 노동이기도, 거룩한 수행의 길로 이끄는 신성한 작업/노동이거나 소득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지만 피하고 싶은 노동이기도 하다.

노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역사적 맥락에 따른 인식의 변화와 임금노동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한계가 뚜렷한 것 같다. 가치에 가격을 매긴 결과가 임금이라면, 그 가치를 따지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지, 온당한 것인지 의심해 봐야 한다. 가치를 매길 수 없이 중요하다고 하는 일(특히 사랑으로 포장하는 가사노동, 돌봄노동)을 왜 가족 단위, 특정한 사람들이 담당하고 있는지 의문을 품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가 남녀 임금 차이의 60%를 차지하는 의미를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양육과 집안일을 둘러싼 분담 투쟁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살펴야 한다. 가사노동을 포함해 열정, 치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공짜가 된 노동이 누군가에게 이득이 되어 차곡차곡 쌓이는 구조를 함께 들여다 봐야 한다. 이를 위해선 노동에 대한 인식의 변화 없이는 어렵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노동에 대한 고민, 노동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꾀하지 않는 노동인권 교육은 불가능하다. 막 씨앗을 품은 고민이든 저만치 앞서가 있는 고민이든 뭐라도 있어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교육 중 마주하는 ‘노동이 뭐예요?’ 라는 질문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 질문이 두려워 ‘알바 10계명’만 줄줄 읊어 주고 나왔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져 보자. ‘노동이 뭘까?’

 

 

*글 쓴이 : 수정_이갈리아(활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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