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살짝쿵] 뭉치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는 것

‘Passion Connected’와 ‘하나된 열정, 하나된 대한민국’

최근 한 지역의 교육청 소속 강사단 역량강화 교육에 다녀왔습니다. ‘반反차별’을 주제로 요청받은 교육이었습니다. 인권교육에서 ‘반차별’의 문제의식을 어떻게 녹여낼 수 있을지,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학교 안의 장면들을 들여다보며 차별을 유지, 강화하는 논리와 통념들에 맞서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했습니다.

이날 여는 이야기로 얼마 전 TV를 보다가 눈에 들어온 장면을 준비해갔습니다. 평창 올림픽의 슬로건이라는 ‘Passion Connected’가 ‘하나된 열정’으로 적혀있는 게 보인 것이죠. 직역하면 ‘연결된 열정’이 맞을 것 같은데, 왜 굳이 하나가 됐다고 번역을 했을까 새삼 궁금해졌습니다. 의도된 오역 즉 번역 과정에서 ‘하나 된’으로 한국화 된 것일까, 아니면 ‘하나 된 열정’이 영역되는 과정에서 번역자가 보기에도 너무 ‘한국스러워’ ‘connected’로 의역한 것이었을까. 중요한 건, ‘하나된 열정, 하나된 대한민국’을 외치는 곳에선 ‘하나’에서 밀려난 존재들, ‘힘/기준/정상/우월성’에서 멀어진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이 때론 은밀하게 때론 대놓고 존재하는 곳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이날 교육장까지 저희를 태워주신 분이 인권운동사랑방에서 활동을 하신 분이었는데, 마침 공교롭게도 2002년 6월 당시 월드컵을 두고 비판적 논평을 냈다가 사랑방 홈페이지가 순식간에 다운이 되어버렸던 이야기를 차 안에서 들었습니다. “‘붉은 악마’ 현상이 바야흐로 우리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음을 경고”한 이 논평은 비판하고자 했던 바로 그 힘에 의해 “500만의 자발적 응원을 매도하는” “국가통합을 저해”한다는 비판/비난을 받았지요.(당시 논평재논평). 16년 전의 ‘붉은 악마’라는 유령이 ‘Passion Connected’란 한층 세련된 탈을 쓰고 ‘하나된 대한민국’으로 움직이는 지금, 올림픽 구호 속의 저 오역을 가능케 한 힘을 찾아 싸워가는 것이 곧 ‘반차별’을 고민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평등이 있는 평화를 바랍니다”

반차별 교육의 여는 이야기로 올림픽 구호를 뜯어보는 김에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 발표한 ‘평창, 평화, 평등 올림픽 3평 투쟁’ 선언을 같이 가져갔는데요. 앞서 사랑방이 2002년 냈던 논평에서 ‘붉은 악마’라는 소용돌이 속에 노동자·노점상의 생존권 싸움이 묻히는 것을 지적한 것의 2018년판 버전이라고 해야할까요, 이번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나온 “장애인에게 ‘평화’는 무엇보다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평등’의 보장”이라는 외침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했지요. “차별금지가 올림픽 정신”(박래군)이라는 말을 떠올리면서 “평등이 있는 평화를 바란다”는 외침을 곱씹어보고자 했습니다.

“차별에 반대하기는 쉽지만 무엇이 차별인지 알기란 어렵다.” 장애인 차별을 찬성하는 사람은 없는데 왜 장애인에 대한 최저임금 적용 예외 규정은 폐지되기 어려운 것인지, 장애인 이동권이란 말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사회에서 여전히 저상 시외버스는 도입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힘과 논리는 무엇이고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곧 열릴 패럴림픽을 두고 ‘장애를 극복한 영웅의 감동 스토리’로 수렴시키는 힘이 바로 차별을 교묘히 가리고 재생산하는 논리이고, 우리가 논파해야 할 통념이겠지요.

 

왼쪽사진:패럴림픽 설명하는 사진. 스키를 타고 있는 모습. 오른쪽 사진: 2018년 구정을 앞두고 전장연이 서울역에서 진행한 농성 천막 사진

패럴림픽이 ‘장애를 극복한 영웅들의 축제’ 가 될 때 ‘노오력’ 이데올로기는 강화된다. 메달을 딴 일부 장애인이 ‘영감’을 주는 존재로 그려질 때 다른 장애인이 받는 차별은 개인의 ‘능력’ 부족 탓이 되기 쉬워지고, ‘어떤 몸/능력이 정상성을 획득하는가’라는 질문은 사라지고 만다. 그/녀가 무엇을 성취했는지 보는 것과 그/녀의 ‘장애’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다르다. (왼쪽 사진. 출처: 위키트리) 전장연이 지난 2월 서울역에서 진행한 농성 사진(오른쪽).

 

“페미니즘 교육은 반차별 교육이다”

교육 중간에 참여자 한 분이 “왜 ‘평등’ 교육이라고 하지 않고 ‘반차별’ 교육이라 부르는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에 교육을 같이 진행했던 동료 활동가는 이렇게 답했지요. “‘평등’의 가치를 다룰 때 ‘반차별’은 현실의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문제의식을 보다 명료하게 드러내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평등’은 그 말이 갖는 급진적인 힘에도 불구하고 형평성이란 이름의 하향평준화를 뒷받침하는 논리로 쓰이거나 ‘동일함’에 기댄 논리로 ‘적극적 우대조치’를 ‘역차별’로 몰아가는 이들에게 오용될 때가 있지요. 가령 2014년 미국에서 레즈비언 커플의 웨딩 케익 제작을 거부했다가 차별금지법에 걸린 빵집 주인을 옹호하는 논리가 사뭇 흥미로웠는데요, 레즈비언 커플에게 케익을 팔 수 있지만 자신의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웨딩 케익은 팔 수 없다, 이는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병역거부와 동일하게 보호받아야 할 종교의 자유가 침해당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차별금지법에 의해 오히려 자신이 ‘역차별’ 받았다는 주장을 보면서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공통의 인식, 결국 누가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공통의 감각을 벼리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떠올리게 됩니다.

“남자는 여자가 자기를 무시할까봐 두려워하지만, 여자는 남자가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한다.” – 마가렛 애트우드

여성혐오를 (재)조명하고 페미니즘 해시태그가 많아지는 가운데 회자됐던 문장인데요. ‘남성혐오’ 운운하며 여성주의를 폄하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사회적으로 남성이란 위치에 부여된 힘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문장이죠.

자신의 위치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기를 상대화 할 수 있다는 것이고 본인이 서있는 관계 속 지형을 읽을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이때 비로소 ‘역차별’ 프레임의 진위, 즉 자신이 정말 ‘약자’의 위치로 밀려난 것인지 아니면 “특권에 익숙한 자로서 평등을 억압으로 느낀 것”인지를 가려낼 수 있지요.

우리에겐페미니스트선생님이필요합니다

출처: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페미니즘학교 트위터

“나에게 있어 페미니즘은 세상이 미리 짜 놓은 구조를 파악하는 시각을, 그래서 그 각본대로 살지 않게 하는 힘을, 그 틀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압력과 회유에 대처하는 태도를 알려 주는 것이었다.”(한채윤). 세상이 미리 짜 놓은 구조를 파악하고 자신의 위치성에 대한 감각을 갱신하는 연습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반차별 교육과 페미니즘 교육은 다르지 않다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혐오세력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뻘소리를 해대는 시절, ‘패션 커넥티드’ 혹은 연결된 열정을 꿈꿀 수 있는 반차별 교육을 함께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 예전 퀴어문화축제 때 나온 구호였는데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된 열정/대한민국’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연대의 발판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고민과 실천이겠지요. 뭉치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는 것, 멍멍! (멍멍이 궁금한 분들은 들 10주년 창립 파티 개사곡 ‘개타령’을 찾아주세요ㅋ)

*작성: 날맹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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