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아동의 날’ 맞이, 서울시/서울시교육청 인권위원회 합동 성명
불행에 잠식당한 어린이‧청소년기, 소소한 진전으로 잔인한 현실을 가릴 순 없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아메리카 선주민 오마스족의 격언으로 이웃과 지역사회의 중요성을 깨우친 이 말은 한국사회 현실에선 절반의 진실에 가깝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마을만으로는 부족하다. 마을 사정이 제각각이고 마을의 힘을 넘어서는 결정들이 ‘아이’의 삶을 위협한다. 마을의 노력을 뒷받침하고 방향을 이끌어줄 ‘국가’가 필요하다. 또한 다음의 질문을 생략하고 있다면, 이 고귀한 말조차 폭력이 될 수 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나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요?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요?’ 우리 사회가 자주 망각하곤 하는 이 질문을 삭제한 마을과 국가는 수상하다. ‘온정의 얼굴을 띤 독재’가 되기 쉽다. 어린이‧청소년은 그저 키움과 돌봄의 대상으로만 존재할 뿐, 동등한 인격체이자 구성원으로서 자리할 기회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한다. “어린이‧청소년이 매 순간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권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어린이‧청소년에게도 인권이란 주춧돌 위에 선 마을과 국가가 필요하다.

오늘은 전 세계가 어린이‧청소년의 존엄을 되새기고 인권 보장의 발걸음을 재촉하기 위해 제정된‘세계 아동의 날’(Universal Children’s Day)이다. 1979년 세계 아동의 날에는 유엔아동권리선언이 채택되었고, 그로부터 10년 뒤에는 선언보다 더 규범력이 높은 유엔아동권리협약이 채택되기도 했다.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국제인권기준들은 말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어린이‧청소년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라! 그들이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보장하고 그 의견을 존중하라! 유엔아동권리협약이 채택된 지 28년, 한국정부가 협약에 가입한 지 26년째를 맞이하는 오늘, 이 나라 어린이‧청소년의 삶은 어떠한가.

우리는 지금 참담한 수치와 잔혹한 사건의 기록들을 마주하고 있다. 한국은 수년째 OECD국가 중 어린이‧청소년의 주관적 행복지수가 연속 꼴찌를 차지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OECD국가 중 최장시간 학습시간이라는 부끄러운 기록도 갖고 있다. 학업경쟁은 날로 치열해지고 저연령화되는데 약속된 미래도 없다. 어린이‧청소년이 가장 열망하는 ‘쉴 권리’와 ‘놀 권리’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잊힌 권리가 된 지 오래다. 그 결과 어린이‧청소년기 전체가 불행에 잠식당하고 있다. 지난11월2일,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가 발표한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소년의 절반 이상이 교사나 어른에게 의견을 말할 때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했고, 학교에 있으면 숨이 막힌다고 답한 이들도 40%에 달했다. 이 나라가 청소년에 대한 무시와 차별, 폭력이 횡행하는 사회라고 답한 이들이 70%에 가깝다는 결과 앞에서는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지난해 경주에 이어 올해 또다시 포항에서 발생한 지진에서도 학생의 안전보다 학습과 규율을 우선시해 학생을 교실에 묶어둔 학교가 있었다. 올 초 전주에서 산업체 파견 현장실습을 나간 학생이 자살한 데 이어, 얼마 전 제주에서 현장실습 중이던 학생이 컨베이어벨트에 목이 끼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끔찍한 소식도 찾아들었다. 우연한 사고가 아닌 제도가 낳는 폭력임이 또다시 입증됐다. 폭력을 피해 집을 나온 청소년들이 갈만한 곳이 없어 거리를 헤맨다는 소식,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갖은 모욕과 법위반에 시달린다는 소식, 신뢰할 만한 기구와 절차가 없어 인권침해를 바로잡을 마음조차 먹지 않는다는 소식은 더 이상 뉴스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지난 8일,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실태조사 결과는 또 어떠한가. 어린이‧청소년의 60% 이상이 본인이 잘못을 했거나 교육적인 목적으로 체벌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어린이‧청소년이 ‘우리는 맞아도 돼요’, ‘쟤는 맞아야 돼요’라고 말하는 이 기괴하고도 참담한 풍경 앞에서 유엔이 체벌을 고문의 일종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외려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어린이‧청소년이 스스로에 대한 체벌을 필요한 일로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아동학대가 이루어지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보건복지부와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에 따르면 2016년 한 해 동안 아동학대로 사망한 아동은 36명이었고, 올해만 해도 포천과 대구에서 입양아동 2명이 학대로 사망하였으며, 최근에는 부모가 목에 개줄을 채워 침대에 방치해 놓은 아동이 목이 졸린 채 숨진 일이 있었다. 숨진 아이의 몸에서는 오랜 학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여전히 훈육이라는 이름의 체벌은 어린이‧청소년의 건강한 성장은 물론 생명까지 위협하고 있다. 어린이‧청소년의 삶에서 행복할 권리를 빼앗고 자기 존엄을 스스로 부정하도록 학습시키고 있는 현실, 2017년 세계 아동의 날을 맞이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오늘이다. 다문화 가정, 이주민 아동들의 현실은 또 어떠한가. 우리의 공교육은 여전히 이들 아동들에게 진입과 적응에서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고, 일부에서는 다문화가정 자녀가 많은 학교를 기피하는 잘못된 현상까지 발생하고 있다.

다행히 서울을 비롯한 몇몇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변화의 물꼬를 틔우려는 노력들이 다각도로 전개되고 있다. 학생인권조례가 전국 4개 지역에서 제정되어 전담기구가 들어섰고 교육청 차원의 학생인권 보장 정책들이 조금씩 확대되고 있다. 어린이‧청소년 참여기구를 설치하고, ‘아동친화도시’를 선포한 지방자치단체도 늘고 있다. 얼마 전 서울시교육청이 마련한 학생인권종합계획은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된 지 5년이나 지나서야 나온 뒤늦은 것이었지만 환영할 만한 커다란 진전이다. 전국 최초로 어린이‧청소년인권조례를 제정한 서울시도 어린이‧청소년인권종합계획을 내놓았고 청소년 전담 인권보호관을 올해 새롭게 지정했다. 타 지역에 비해 선도적이긴 해도 어린이‧청소년의 엄혹한 인권 현실을 해결하기엔 충분치는 않다. 이들 조례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도 많다. 교육청과 시의 정책에서 인권정책은 여전한 변방이고 어린존재들의 인권을 터부시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안팎의 걸림돌도 무성하다. 우리 위원회들이 열과 성을 다하여 교육청과 시의 변화를 견인하고 있지만 역부족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소소한 변화에만 어린이‧청소년의 삶을 내맡겨두기 힘든 이유다. 전국적 차원의 변화를 선도할 법‧정책의 마련과 통합기구의 설치가 시급하다.

이달 말, 정부는 유엔아동권리협약의 이행 경과와 향후 계획을 담은 5‧6차 국가보고서를 유엔에 제출한다. 부실한 변명과 과장된 보고를 늘어놓는 게 아니라 분명한 의지와 실질적 계획을 수립하는 게 국가의 책무다. 우리는 촛불의 힘으로 탄생한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사항이기도 했던 ‘아동청소년인권법’의 시급한 제정이 유엔아동권리협약과 엄혹한 인권 현실이 촉구하는 우선적 과제라 믿는다. 어린이‧청소년의 삶이 펼쳐지는 모든 공간에서 인권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어린이‧청소년을 권리의 주체로 선포하고 통합적 정책과 권리회복절차를 마련할 기본법 제정이 절실하다. 학생인권조례의 허약함을 보강하고 조례마저 없는 지역의 학생인권 보장을 위해서는 초중등교육법 개정도 절실하다. 학생인권은 비단 학생들의 존엄한 학교생활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나라를 인권과 민주주의에 기초한 민주공화국으로 만드는 교육적 기틀이기도 하다. 서울시교육청과 서울시도 아동청소년인권법 제정과 초중등교육법 개정에 힘을 보태야 한다.

무엇보다 어린이‧청소년의 인권 문제가 괄시받고 해결이 더딘 이유는 어린이‧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없음’ 상태와 무관하지 않다. 표가 되지 않으니 그들을 위한 정책도 배제되거나 답보를 거듭한다. 어린이‧청소년은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상 초유의 정치적 사건에서 함께 민주주의의 촛불을 치켜든 시민이었지만, 법적으로는 여전히 ‘비(非)시민’ 상태다. OECD국가 중 유일하게 한국만이 만19세 선거권이라는 높은 장벽을 유지하고 있다. 서울시교육감과 서울시장이 선거연령 하향을 연거푸 촉구한 것도 같은 이유일 터이다. 선거제도 개혁이라는 과제를 맡아 설치된 국회 정치개혁특위의 비상한 노력과 정치적 계산을 내려놓은 시급한 합의가 절실하다.

인간의 존엄은 계산될 수 없고 어떤 이유로도 유보될 수 없다. 어린이‧청소년의 존엄도 마찬가지다. ‘세계 아동의 날’을 맞이한 오늘은 어린이‧청소년이 신뢰할 만한 사회,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사회, 시민으로 대접받는 사회, 그리하여 인권과 민주주의를 사랑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새로운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그 시작을 위해 우리 위원회도 부단히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2017년 11월 20일

서울시 인권위원회/ 서울시교육청 학생인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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