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살짝쿵] 당신이 아는 그 ‘청소년’은 없다
‘아이들은 왜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을까’라는 질문 다시 쓰기

교육에서 “요즘 청소년 또는 10대 하면 어떤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나요?”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이기적이다, 싸가지 없다, 무섭다’와 같이 부정적인 답변이 돌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안됐다’ 정도가 그나마 우호적인 답변이랄까. 청소년 범죄 관련 보도로 온 나라가 들썩이고 나면 청소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더욱 확산되고 견고해지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청소년인권을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다.

얼마 전 요청받은 교육의 제목 역시 “아이들은 왜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을까”였다. 바빠서 정신 줄을 놓고 있다가 웹 홍보물이 나오고 나서야 주최 측에서 붙인 이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청소년 범죄나 폭력이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 발생하는지 살피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의도에서 붙인 제목일 테지만, 제목이 영 마음에 걸렸다. 요즘 청소년 전체가 폭력적이라고 단정하는 인상을 주기 쉬운 제목이었다. 수정을 제안하기엔 이미 늦었다. 교육에서 직접, 제목에 담긴 문장을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 어떻게 바꾸면 좋을지 다룰 수밖에 없겠다 생각하고 이야기의 얼개를 잡아보았다.

 

출발점 고르기 : 청소년, 사회적 약자의 다른 이름

먼저 낱낱의 청소년 개인이 어떤가는 제쳐두고, 청소년이라는 존재가 우리 사회의 대표적 ‘사회적 약자’라는 사실부터 환기하기로 했다. 청소년은 누군가에게 생계를 의탁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약자이고, 참정권을 부정당해 자기 스스로를 대표할 수 없는 정치적 약자이며, 의견을 말할 때조차 어른이나 교사의 눈치를 보거나 불이익을 걱정해야 하고 공부 이외의 모든 일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압력 속에 OECD 최장시간 학습을 강요받고 있는 사회적 약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약자라는 위치성’ 때문에 청소년은 다른 각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을 지닌 존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2015년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솔로강아지>의 저자, 초등학생 시인 이순영은 어른들은 대개 모르는 강아지의 외로움을 노래했다. 침이 묻은 인형이 누군가에게는 쓰레기지만 강아지에겐 애착의 대상임을 안다. “외로움이 납작하다.” 이 말은 이순영 시인이 남다른 창조성과 관찰력을 지녔기에 쓸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사랑조차 허락받아야 하고 애착의 대상을 빼앗겨본, 강아지와 같은 처지에 놓여보았기에 쓸 수 있는 언어이기도 하다.

 

솔로강아지 시 내용

 

지난 11월 2일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주최로 열린 <2017 청소년 인권실태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만15세 청소년 김윤송 역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실태조사에서 청소년들이 겪어내고 있는 인권침해와 고통이 숫자로 표현되었지만, 저와 같은 청소년, 제 친구들에게 인권침해는 단지 숫자가 아니라 한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숫자로 표현될 수 없다는 말. 숫자에 길들여진 ‘오염된 비청소년들’에겐 찾아보기 힘든 통찰이다.

 

허들 뛰어넘기 : ‘하나의 청소년’은 없다

사회적 약자의 위치라고 해서 청소년이 언제나 피해자로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에서처럼 사회변화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청소년도 있고, 초등생 살인사건이나 학교폭력사건처럼 끔찍한 폭력을 가하는 청소년도 있다. 그런데 청소년 범죄에서만 유독 그들의 연령이 강조되고 ‘요즘 아이들의 폭력성’이라는 프레임으로 청소년 집단 전체가 매도되곤 한다. 2016년 여교사에 대한 학부모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요즘 학부모 왜 이러나’, ‘요즘 30‧40대 남자들 왜 이러나’와 같은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사건이 일어나면 그 청소년들이 어떤 사회적 조건에 놓여 있었는지, 어떤 관계의 역학이 있었는지에 주목하기보다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청소년’만 부각시키는 경향도 있다. 돌이켜보면 청소년들이 사회변화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대표적인 시기마다 청소년 범죄 관련 보도가 급증하고 ‘미숙하고 충동적이며 위험천만한 청소년 문화’를 탓하는 목소리가 커지곤 했다. 청소년을 위험집단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청소년인권 보장에 대한 주장을 잠재우려는 시도인 셈이다.

최근 몇몇 언론이 보도한 ‘교실을 점령한 혐오문화’에 대해서도 주의깊은 ‘수용’이 필요하다. 여성혐오, 엄마혐오와 같은 혐오 문화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확산되는 사회적 배경을 짚은 보도였지만, 세 가지 측면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하나는 그와 같은 혐오문화에서 고통을 느끼고 저항하기도 하는 청소년의 존재를 간과하거나 미약하게 다룬다는 점이다. 장애학생을 놀리는 비장애학생도 있지만, 장애학생의 곁에 서는 비장애학생도 있다. 지난해 말, 동성애 혐오 수업을 진행한 교사를 교육청에 진정한 학생은 당사자가 아닌 이였다. 두 번째는 교사나 학교가 조장하는 혐오문화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분석이 약하다는 점이다. ‘술집여자나 되려고 그러냐.’ ‘누구한테 꼬리치려고 그러냐.’ 여학생의 복장에 대한 교사의 여성혐오적 비난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학교에서 오랜 기간 지속되어온 차별이다. 마지막으로 청소년이 그 누구보다도 혐오의 대상이자 피해자라는 사실이 간과된다는 점이다. 남자 중학생을 흔히 ‘짐승’인 양 묘사하는 발언들도 많고, 수많은 이유가 담긴 중학생들의 사회적 고통은 그저 ‘중2병’으로 취급된다. “니가 초딩이냐”, “애들은 때려서라도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아야 한다”와 같은 모욕들은 또 어떤가. 결국 청소년들은 아주 쉽게 하나의 모습을 지닌 집단으로 대상화되고 한다.

 

존재와 문제의 복합성에 주목하기

하나의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열등하거나 위험하다고 간주하는 사고야말로 바로 차별이고 혐오다. “그런 애도 있고, 아닌 애도 있고.” 요즘 청소년들의 혐오문화가 심각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한 청소년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사회적 약자로서 청소년의 보편성에 주목해야 하지만, 동시에 이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대상화하여 폄훼하는 사고 습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여교사를 향한 남학생의 성적 폭력은 젠더권력에 대한 분석 없이 단지 ‘교권’ 문제로만 해석될 수 없다. 같은 또래라 해도 여성과 남성,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기도 하다. 초등 여학생이 서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 <우리들>의 영어판 제목은 <The World of Us>(우리들의 세계)다. 청소년들에게도 그리고 청소년들 각자에게도 넓고 깊은 세계가 있음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안다’고 착각하지 않고 우리 곁에 있는 그/녀들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된다.

 

영화 <우리들> 표지

 

2015년 한글의 날에 맞춰 발표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의 성명서 제목은 <이게 한글이 아니면 두글이애오? 청소년문화 그만 까새요>였다. 청소년의 언어파괴 현상이 심각하다는 언론보도와 사회인식에 항거하여 ‘언어파괴가 아닌 언어문화’임을 선언하는 성명이었다. 성명에은 먼저 자기들은 ‘지자체’니 뭐니 줄임말 잘도 쓰면서 청소년이 흔히 쓰는 ‘버카충’만 쓰레기냐, 욕쟁이 할머니는 정감있다고 하면서 청소년이 쓰는 욕만 문제냐며 이중잣대의 문제부터 짚는다. 성명은 나아가 청소년 언어문화가 형성된 배경으로 ‘비청소년들과 평등하게 소통할 기회도 적고 고급진 언어를 쓸 일도 별로 없는’ 고립된 사회적 위치를 제시한다.

존재와 문제의 복합성에 주목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전체 청소년의 삶을 관통하는 공통의 조건에 주목하면서도, 청소년 개개인을 하나의 세계를 지닌 존재로 대우하는 것. 나아가 청소년 문화를 분석할 때 ‘청소년’이라는 존재가 아니라 문화의 ‘사회적 배경’에 주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아이들은 왜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은 그런 의미에서 ‘무엇이’ 청소년들 사이에 폭력문화를 확산시키는 토양이고 또 ‘무엇이’ 청소년들의 인권감수성을 높이는 거름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 글쓴이 : 배경내(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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