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살짝쿵] 말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이 필요하다
다양한 소수자를 초대한 생생토크에서 나눈 이야기들

인권교육에서 소수자를 초대해서 당사자와 교육 참여자가 만나는 인권 생생토크를 할 경우가 종종 있다. 초대된 소수자들이 풀어놓는 이야기들이 때로는 차별적 상황에 대한 공분을 일으키곤 한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초대되어 온 소수자들을 힘든 삶을 사는 존재로 대상화하거나 안타까워하고 교육 참여자 자신과의 연결점을 찾는 데에는 실패하고 끝나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에 진행에서 아주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특히 이번에 마련한 생생토크 시간은 준비하는 입장에서 더욱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다섯 차례의 인권감수성을 깨우는 교육이 있었지만, 참여자들은 장애인, 성소수자, 어린이/청소년에 관한 제도적 차별은 쉽게 인식하고 반대하지만, 연민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전 교육에서 장애인 당사자들 앞에서 어떤 비장애인이 “여러분도 장애인이 될 수 있으니, 장애인들에게 특별히 잘해야 합니다”라고 했을 때 이 말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지 물었다. 몇 분을 제외하고는 장애인을 위한 말 같은데 왜 욕을 먹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이어서 그렇다면 자신들이 장애인들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는 말도 나왔다.

그래서 초대 손님들에게 “다름, 그 순간?”이란 제목으로 일상적으로 존엄을 침탈당했던 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부탁했다. 세상에 넘쳐나는 치우친 기준, 이 기준이 제시한 편협한 정답들에 길들여진 ‘나’들이 ‘선의(善意)’라고 믿고 있는 것이 정말 누군가에게 ‘선의’로 가닿고 있는지 의문을 가져 볼 수 있길 바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련된 생생토크에서 교육 참여자들은 초대 손님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었을까?

다름 그 순간은?

말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어떻게’ 듣는 사람인가?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고 교육 참여자들로부터 어떤 질문/의견이 나왔을지 예상해 보거나, 혹은 여러분들이라면 어떤 말을 건넸을지 답해보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이야기를 읽고 답을 머릿속에 그려본다면..?

  <이야기 1>

제가 지하철에서 겪었던 일을 말할까 해요. 저는 장애인이라서 서울시에서 제공한 바우처카드를 사용해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해요. 그런데 내 카드는 신용카드나 체크카드와는 다르게 개찰구 승인 소리가 ‘삑’하고 나는 게 아니라 ‘삐빅’하고 납니다. 바우처카드로 통과하느냐, 신용카드로 통과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소리가 나는 거죠. 소리가 다르게 나는 이유는 선별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우처카드를 사용하라고 ‘허락’되지 않은 사람이 카드를 사용할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요.

그런데 하루는 ‘삐빅’하고 홍대역에서 개찰구를 통과해 나오는데, 지하철 역사 노동자가 저를 붙잡는 거예요.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그래서 제가 얘기했죠. 먼저 역무원증을 보여주면 내 신분증을 보여주겠다고요. 그 쪽에서 역무원증을 보여주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제 신분증을 보여줬어요. 그런데, 대뜸 위조된 것이 아니냐고 묻는 거에요. 어디가 장애인이냐는 말이죠. 그래서 그 분에게 제 장애를 보여줬습니다. 저처럼 직립보행하는 장애인은 그들 보기에 ‘멀쩡한’ 사람이 장애인을 사칭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나는 개찰구를 지날 때마다 검열 받을까 두려워해야 해요. 그리고 역무원이 개찰구에 서 있을 때면 복지카드를 준비하며 내 장애를 증명해야만 해요. ‘삐빅’이란 소리를 항상 내면서, ‘나는 장애인입니다’라는 소리를 계속 내면서 살아야 해요. 그럴 때면 자꾸 위축되고 쭈그려드는 느낌…그리고 ‘내 존엄은…?’하는 의문이 고개를 듭니다.

☞ 이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에게 돌아온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이야기 2>

제가 학교에서 장애인으로 겪었던 일을 말씀 드릴게요. 제가 학교 때 제일 많이 들은 말이 “너는 장애인도 아니야. 힘내라!”는 이야기였어요. 어렸을 적, 체육을 잘하는 편이었는데 점점 하기 싫어졌어요. 어느 날 체육시간에 철봉을 하는데, 제가 한 손에 장애가 있는데 철봉을 하려니까 체육선생님께서 “00이, 힘내라” 외치시는 거예요. 하지만 당연히 저는 철봉을 붙잡자마자 떨어졌어요. 한번은 음악 시간에 장구를 치는데 채를 두 손 다 잡을 수 없어서 한 쪽은 손으로 치고, 한쪽에만 채를 들고 치는데 선생님이 “00이는 잘 하니까” 할 수 있다며 격려를 하셨어요. 하지만 이 두 격려가 제게는 저를 자꾸 호명해서 차이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저의 장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장애극복 서사를 요구하는 것 같았죠.

☞ 이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에게 돌아온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이야기 3>

“나이도 어린데, 아직 학생인데 그런 일도 하고 기특하네. 힘내.” 저는 이 말을 듣는 게 제일 싫어요. 오늘처럼 제가 어린 나이인데 강의를 하러 가면 기특하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듣게 돼요. 어리니까 기특하다고 당연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여러분(비청소년)한테 이런 강의를 들으러 온다고 기특하다고 말하지 않잖아요? 그냥 웃으며 넘기는데 어떻게 하면 이런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어요.

☞ 이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에게 돌아온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이야기 4>

지난해 퀴어 축제가 끝난 후 축제가 문란하다는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야한 표현은 전체 축제에 10%도 되지 않아요. 그런데 미디어가 이런 부분을 자극적으로 보도하며, 퀴어들은 다 이렇다고 부각하고 선동하는 부분이 많아서 그것만 인식되는 거지요. 그리고 “동성애자, 그래 인정해, 그런데 왜 이렇게 시끄럽냐, 왜 다 벗고 주변에 피해를 주느냐고”하는 말도 들었는데 그것은 하나의 혐오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내 취향은 아니라는 말, 성소수자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건 자신의 시야를 좁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해요. 정작 축제에 오거나 성소수자 활동에 함께하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하지 않아요.

☞ 이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에게 돌아온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다 듣고 답을 해 보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들었던 것인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인권교육에서 종종 “말하는 사람에겐 듣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문장을 인용하곤 한다. ‘말하는 사람’이란 말이 없도록 강요되었거나, 말하지만 말이 아닌 게 되었던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냈을 때를 의미한다. 듣는다는 것의 의미도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란 것은 누구나 짐작할 것이다. 그렇기에 듣는 사람에겐 그이가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듣는가가 중요하다. 때론 듣고 있지만 듣지 않았던 것과 같은 순간을 만들어버리는 듣는 사람들도 있다. ‘말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어디에’ 서서, ‘어떻게’ 듣는 사람이었던가?

질서를 흔드는 질문이 끊임없이 필요하다!

아래에 나온 질문/의견들은 어떤 위치성에서 발화된 말인가?

 “의심받았으니 불편했을 것은 같아요. 하지만 역무원도 부정승차자를 잡아야 하니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럼 어떻게 부정승차를 감시하겠어요?”

“물론 좀 부당한 느낌도 있겠지만, (무임승차)혜택을 받는 만큼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지하철 역무원도 해야 할 일들을 한 것이고, 체육시간에 선생님이 했던 응원은 장애인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고, 음악 선생님도 최대의 관심을 보였던 것 같은데 꼭 그걸 부정적으로 봐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럼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요??”

“아이들 키우면서 기특하다, 대견하다 이런 말을 수시로 칭찬으로 써 왔는데, 기특한 걸 기특하다고 말을 못하나요?”

“우리가 서로(장애/비장애, 성소수자/이성애자, 청소년/비청소년) 이해해주어야 해요. 보통 사람들은 인권에 대한 전문가적 지식이나 견해를 가진 사람이 아니지 않나요? 선의로 말한 것을 그렇게 자꾸 부정적으로 받는다면 어떻게 장애인이나 청소년을 대할 수 있겠어요?”

“아니 저는 동성애 반대하지 않는데 그래도 역시나 좀 너무 과하게 표현하는 것은 좀 그런 것 같아요. 안그래도 동성애 혐오가 있는데 자꾸 눈에 띄게 할수록 일반인과 거리만 멀어지는 거 아닐까요?”

인권교육은 듣는 사람이 소수자/약자의 목소리를 듣고 난 후 자신의 위치를 고민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질서를 뒤흔드는 질문이 필요하다. 질문은 계속 움직여야만 한다. 이 움직임을 방해하는 일상의 언어는 “원래 그래”이거나 “어쩔 수 없다”는 말이다. 이날 초대 손님으로 온 이들의 목에 가시처럼 걸렸던 말도 다름 아니라 ‘어쩔 수 없지 않나’, ‘그 정도는’, ‘꼭 그걸 부정적으로 보나’, ‘기특한 걸 기특하다 말을 못하나’, ‘선의로 한 것일 뿐인데’, ‘자꾸 눈에 띄게 할수록’과 같은 발언이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세상에서 억울함의 실체를 말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어렵게 말문을 연 사람들에게 그것이 일반적 정서, 일반적 문화라는 중립적 개념을 들이미는 것은 약자들의 분노를 짓누를 뿐이다. 여성/장애인/성소수자처럼 일상적으로 차별을 겪는 이들에게 ‘그 정도쯤은 감내하라’거나 혹은 ‘그 정도면 괜찮은 것 아니냐’하는 말은 이이들이 동시대인으로 누려야할 삶조차 부정하며 과거의 여성/장애인/성소수자의 삶과 비교해 ‘좋은 시절’을 살고 있는 거라 세뇌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인권은 질문하는 힘이기도 하고, 질문을 바꾸어 내는 힘이기도 하다. 그 힘을 빌어 우리가 자신에게 되돌려야 할 질문은 무엇일까?

초대 손님들을 이렇게 되묻는다.

“지하철 공짜로 타면서 그 정도도 못하냐는 물음에서 ‘그 정도’가 저에겐 끊임없는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일상의 존엄을 건드리는 부분이었습니다. 누군가 부정승차를 어떻게 막을 거냐는 질문하고 있을 때 당신은 누구의 이웃이었을까요? 부정승차를 감시하는 지하철공사의 입장이거나 국가의 입장, 아니면 ‘삐빅’이라는 소리를 통해 나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드러내야 하는 장애인 입장, 그 어느 쪽이었을까요?”

“장애인인 너에게 선생님은 최대의 관심을 보인 건데 그렇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그럼 어떻게 해야하나고 물으셨는데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갈등없는 상태를 최적으로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 늘 좋은 것인가요? 만일 선생님이 저를 특이한 존재로 부각시키지 말고 저를 따로 불러서 체육시간에 이걸 하는데,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묻고 합의한 사항대로 진행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선생님의 선의가 제가 겪은 열패감보다 우선하는 것일까요? 선한 의도가 있다고 해서 모든 행동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기특하다는 말이 칭찬이고 긍정의 말이지 않느냐고요? 제가 어르신이 무얼 잘했다고 해서 기특하다고 하진 않잖아요? 기특하다는 말은 평등한 관계에선 들을 수 없는 말이지요. 그리고 문제제기를 하면 저희에게 예민하다고 하시는데 예민한 게 나쁜 게 아니라, ‘어린 것’들로 여겨질 때 차별을 겪었기에 저희에게 이 말이 기분 나쁘고 불편하게 들리는 게 아닐까요? 기특하다는 ‘나’에겐 칭찬일 수 있지만, 동시에 기특하게 행동하기를 요구받는 제 또래의 다른 친구들은 기대에 못미치는 존재로 밀어내는 말이기도 하구요.”

“동성애자 너희들은 왜 그렇게 시끄럽고, 왜 다 벗고 나와서 눈에 띄게 하여 이질감을 주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나 시끄럽게 하지도 않고, 존재조차 감추었을 때는 저희를 인정해주셨나요? 이제야 소리를 내자, 저희에게 돌아온 말은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것이었지요. 정체성은 찬반토론이 될 수 없는 거 아닌가요? 우리가 노인을 반대할 수 있나요? 흑인을 반대할 수 있나요? 그렇다면 성정체성이 다른 성소수자도 결코 반대할 수 없는 거 아닌가요?”

잠금해제 : 누군가의 ‘억울함’과 ‘분노’에 어떻게 손을 맞잡을까

토크에 초대된 장애인권활동가는 교육 가서 애써 몇 시간을 강의했는데도 “그렇다면 장애인을 어떻게 인식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으로 모든 게 모아질 때 아쉽다고 말한다. 장애인이 모두 다르고, 그 사람의 구조적, 사회적 문제, 개인이 받는 각기 다른 차별적 시선들을 모두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을 하나의 뭉텅이로 일반화시키는 게으른 태도를 마주할 때는 힘이 빠진다고 한다. 또, “시설에서 장애인들이 벗어나면 어디에서 살아야 합니까”라는 질문이 어떤 면에서는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밀어냈던 존재가 지역사회로 돌아와서 살아야 하는 문제를 너희 당사자들이 답을 내놔야 하는 것 아니냐는 듯이 물어올 때면 구름으로 뒤덮인 방에 갇힌 기분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답답한 심경을 드러낼 수도 없단다. 그 이유가 무언인지는 이 날 토크 현장에서 바로 찾을 수 있었다. 교육 참여자 한분이 “보통사람들은 인권전문가가 아니니 이해해주어야 하지 않는가”라고 항변을 해온다. 초대 손님인 그이는 이것이야말로 비장애인 중심의 사고방식이 아닐까 묻는다. 장애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고는 하지 않고, 비장애인의 입장은 ‘무지해서’라는 말 뒤에 숨어 늘상 이해받기를 원한다면 차별은 잠금해제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의 ‘억울함’과 ‘분노’를 어떤 자세로 듣고 어떻게 손을 맞잡아야 할까?

첫째, 당사자들은 시끄럽게 굴고,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조용하면 바뀌는 것은 없다. 대통령 탄핵도 몇 달 동안 시끄럽게 촛불시위를 했기 때문에 얻어낸 것. 따라서 당사자들은 자신이 불편해 하는 부분을 시끄러울 정도로 말하고 다닐 것.

둘째, 시끄러운 것에 귀를 기울일 것. 시끄러운 것에는 이유가 있고, 그들이 왜 그런 목소리를 내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 보는 것이 중요. 이때 비로서 인권의 쌍방 신호등이 켜진 것.

셋째, 불편한 것에 관심을 갖기. 불편한 것에 관심을 가져야 바뀌게 됨.

넷째, 작은 것이어도 좋아. 내가 실천/참여할 수 있는 일들은 없는지 찾아보는 것. 성소수자 행진을 했을 때 지지해주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든든한 기분이었음.

다섯째, 한 번에 바뀌는 것은 없다. 인권에는 매뉴얼이 있을 수 없기에 인권지침을 따라 행동만 수정하려 하기보다 사고를 확장하는 계기로 삼을 것.

애초에 차별받아 마땅할 존재란 없다. 권력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나누는가에 따라 밀려난 사람들이 그저 차별에 노출되어 왔을 뿐이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를 갖지 못하고 권력이 가르쳐준 말만 계속 되풀이한다면 우리는 너나없이 차별하는 존재일 수도, 차별받는 존재일 수도 있다. 기준을 의심하고 질서를 무조건 따르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들리지 않았고 듣지 않았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소수자와의 생생토크라는 한번의 기회가 그 문을 다 열어젖힐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초대받은 소수자들이 쏟아놓은 ‘작아서 표도 날 것 같지 않은’ 일상적 모욕의 순간들을 감지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시간이 되었다면 좋겠다.

 

정주연(루트),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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