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살짝쿵] 때려도 되지만 때리지 않는 게 존중일까요?
존중은 어디에서 오나요?

인권교육을 하다 보면 사람에 대한 존중을 온정적이거나 허용적인 태도와 동일시하는 참여자들을 만나곤 합니다.

“저는 애들한테 자유를 허용해주거든요.”

“공무원이니까 민원인이 뭐라 하든 일단 들어는 줘야죠.”

“발달장애인이라 그러는 거니까 저희가 너그럽게 대해줘야죠.”

‘~해 준다’로 끝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긴장감과 의문이 뒤따릅니다. 본디 자기 것이 아닌 것(타인의 존엄과 권리)을 취해놓고선 그 일부를 나눠주거나 양보하는 행위를 존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강자의 관용에 기대어 기울어진 권력관계를 바로잡는 일은 가능할까?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개인의 태도 변화로 완성되나? 이를 테면 ‘때려도 되지만 때리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것’을 존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존중을 개인의 태도나 관용의 문제로 축소시키는 인식은 최근 유력 정치인들이 성소수자 인권과 차별금지법에 대해 내뱉는 말들에도 깔려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성소수자들이 받는 차별에는 반대하지만 (사회적으로) 차별금지 입법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 이와 비슷하게 ‘학생을 존중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학생인권조례에는 반대한다’는 얘기도 자주 접해왔습니다.

존중은 어디에서 오나요?

그래서 참여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있습니다. 존중은 어디에서 오나요?

 

인간에 대한 존중은 ㅇㅇㅇ에서 나온다

최규석의 웹툰 <송곳>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빈 칸을 만들어두고 들어갈 말을 떠올려보시라고 하면 이런 답들이 나옵니다. 사랑, 배려, 사람에 대한 관심, 인권의식, 인권감수성, 인본주의 등등.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웹툰 원문에 나와 있는 답을 공개합니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온다

존중이 ‘두려움’으로부터 나온다는 작가의 말을 함께 곱씹어봅니다. 신앙을 가진 이들은 신을 사랑하고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합니다. 경외의 존재를 함부로 대하는 이들은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존중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사전에서는 존중(尊重)을 ‘높이어 귀히 대함’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어떤 존재를 얕잡아보아도 괜찮다고 허락하고 부추기는 제도와 질서에 균열을 가하려면 개개인의 태도 변화만으론 부족합니다. 강자의 관용이나 선의(善意)에 기댄 존중은 언제나 철회될 수 있습니다. ‘언젠가 나중’을 마냥 기다리고 있는다고 존재의 사회적 위치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기울어진 권력관계를 바로잡으려면 얕잡아보아도 괜찮다고 분류된 존재들을 두려워하게끔 만드는 지금 당장의 변화가 뒤따라야 합니다.

기꺼이 두려움을 선택할 수 있다면

두려움을 조직하라! 어린이를, 장애인을, 여성을, 노동자를, 이방인을, 가난한 자들을 막연하게 존중한다가 아니라, 두려움을 갖고 진지하게 대할 의향이 있습니까? 두려움을 갖도록 도와줄 구조와 제도의 변화를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존중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 글쓴이: 개굴_경내(들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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