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교육]여성혐오를 재생산하는 학교 생활지도를 돌아보다

[기획 – 페미니즘과 교육]  여성혐오를 재생산하는 학교 생활지도를 돌아보다

우완(서울 이화여고 교사)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다가 자주 발끈합니다. 〈광장〉, 〈메밀꽃 필 무렵〉, 〈무진기행〉…….
좋아했었지만 그 작품들에 담긴 여성혐오적 시선에 질려 이젠 학생들에게 안 가르치고 싶습니다.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 조례 시행 지역에서는 학교의 두발과 복장 규제는 명문화된 규정에서 대부분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명목상으로 규정에서 삭제했을 뿐 두발과 복장, 그리고 외모에 대한 규제는 여전히 학교 안에 존재한다. 공청회 등을 통해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결정하는 절차를 거쳤다는 명분 아래 버젓이 두발과 복장에 대한 규정이 남아 있는 학교들도 있다. 파마나 염색을 금지하거나 교복 치마의 길이를 규제하는 것, 악세서리 착용이나 화장을 금지하는 것 등이 그렇다.
벌점을 주는 등의 명문화된 제도적 규제로 나타나는 것만이 생활지도는 아니다. 생활지도는 교사와 학생이 대면하는 장면에서 면박을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점잖은 충고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기도 한다. 수업이나 조·종례 중 교사의 발화를 통해 언급되는 형식으로 학생들에게 주입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수업 시간에 거울 보기, 학교에서 고데기 사용하기와 같은 여학생 특유의 적극적 외모 가꾸기 행동을 ‘학생답지 않은 행동’으로 규정하는 발화들이 있다. 이런 비공식적이면서도 그 메시지가 분명한 생활지도들은 밖에서 보기에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학생들에게는 깊숙한 영향력을 미친다.
위와 같은 규제 아닌 규제들은 표면적으로는 ‘공부에 집중하도록’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외모를 치장하는 일에 신경 쓰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은 면학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는 학교에 걸맞지 않다는 것이다. 또 ‘단정함’과 ‘학생다움’을 근거로 삼는 경우도 많다. 나중에 사회생활을 하게 될 학생에게, 학교라는 공적인 공간에 있을 때는 제 집에서와 같은 자유분방한 옷차림이 아닌 단정하고 학교생활에 걸맞는 옷차림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면학 분위기’, ‘단정한 옷차림’, ‘학생다움’이라는 말을 잘 살펴보면 그다지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지만은 않다. 여학생이 두발과 복장을 지적당할 때에는 남학생의 경우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잣대가 동원되기 때문이다. 치마의 길이를 규제하는 것은 여학생이라면 몸의 노출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화장과 파마·염색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외모를 꾸며 자신의 성적性的인 면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외모를 가꾸는 행위는 공부가 아닌 곳에 시간을 낭비하는 행위라는 이유로 비난받지만 이것 역시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여성의 외모 가꾸기를 시대마다 다른 기준으로 통제하던 양상의 반복이다. 결국 이런 규제들에는 여학생에게서 드러나는 여성성을 혐오의 대상으로 보는 차별적인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래에서는 2005년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학술대회 자료집에 실린 논문 〈복장과 외모의 젠더정치〉(안태윤)의 몇 부분을 인용하여 1940년대 조선총독부의 전시 체제에서 발생한 여성의 의복과 두발, 그리고 화장에 대한 통제 담론들을 살펴보며, 그것과 지금의 학교 내의 여학생 외모 가꾸기 규제의 양상에 담긴 여성혐오적 시선을 찾아보기로 하겠다.

1940년대 조선총독부의 여성 통제 담론과 오늘날의 학교

1940년 조선총독부는 총력전체제로 이행하면서 여성의 복장과 외모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고급스러운 복장은 비국민적 행위로 비난되었고, 복장뿐만 아니라 화장과 머리에 대한 규제도 병행되었다. 먼저 단발에 대한 규제가 시행되어 여학생과 여성지식인의 단발이 금지됨에 따라 2-30년대에 신여성으로서 단발을 하여 모던함을 표현했던 여성들이 이제는 국가의 규제에 따라 머리를 길러 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성적인 매력을 드러내는 것이 남성을 위협하고 사회에 해를 끼치는 악으로 동일시했다. 이러한 외모에 대한 비판은 군국주의로 인해 새로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전 시기의 여성 억압의 경향이 전쟁을 명분으로 강화되어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전쟁의 명분이 동양에서 영국과 미국의 세력을 쫓아내는 것에 두어짐에 따라 화장과 파마는 퇴폐적인 영미의 여성을 흉내 내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이 시기 여성의 외모는 개인의 성적 품행과 같은 여성으로서의 섹슈얼리티를 판단하고, 국가와 연관되어 서구의 “타락한” 의식을 가졌는가 아닌가, 국민으로서 적합한 의식을 가졌는가 아닌가를 시험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 안태윤, 〈복장과 외모의 젠더정치〉
인용한 부분은 전쟁이라는 특별한 시기에 사회에서 여성의 몸을 보는 시선이 어떤 관점으로 재구성되는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다. 1920~30년대까지만 해도 서구의 근대 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잡지 등을 통해 화장술은 신여성으로서 꼭 배워야 할 것으로 언급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새롭게 미의 기준으로 자리 잡은 서구적 아름다움을 칭송하던 20~30년대를 지나, 사회가 모두 전쟁 비상 체제로 돌입한 1940년대에는 국가가 나서서 여성의 외모 가꾸기를 단속하기 시작한다. 서구 세계의 것이 아닌 전통적인 것을 추구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화장과 파마가 그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제1순위의 목표인 전쟁 수행 아래에서 여타의 개인적 욕구는 포기해야 한다는 압력이고, 또 여성의 머리 모양, 차림새, 화장 여부가 개인의 것이 아닌 공동체의 것이라는 생각이다. 해당 사회의 여성이 어떻게 꾸미고 있느냐가 사회의 분위기를 표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이것이 사회 전체와 어울리지 않을 때에는 통제 주체의 책임이 될 수도 있으니 여성들의 외모 가꾸기를 개인이 결정할 영역으로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여성을 국가가 계몽하고 하나하나 관리해야만 할 미숙하고 열등한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학교가 흔히 학생들의 생존 경쟁이 이루어지는 전쟁터로 비유되고 우리의 입시 현실이 ‘입시 전쟁’이라는 말로 언급되곤 하는 것을 떠올려 보았을 때, 전시 총동원 체제에서 여성들을 통제하던 마음과 학교에서 여학생을 통제하는 마음 사이에는 공통적인 욕구와 동기가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면학 분위기 조성’이라는 명분을 들이댄다는 것은 결국 여학생들의 머리 모양과 복장이 학생 개개인의 것이 아닌 학교 공동체에서 통제해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이라는 점에서 위에 인용된 조치와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공부해야 할 학교에서 외모나 신경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는 명분은, 결국은 여학생들은 자신을 꾸미는 욕구를 주체하지 못해 학교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잘 판단하지 못하는 열등한 존재들이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목소리인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인용구에서 또 주목을 끄는 부분은 “화장과 파마가 시금석이 되었다”라는 부분이다. 이는 학교에서도 화장과 파마가 ‘노는 애’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처럼 통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어지는 다른 부분을 함께 살펴보자.

화장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 “자연 그대로가 위생적이고 경제적이며 시간도 절약”된다고 선전되었다. (……) 파마를 하거나 화장을 한 여성은 “남양지방의 창부와 같은 분위기”를 보여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남성을 유혹하므로 사회의 안정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신여성의 복장과 머리모양은 유행이나 사치로 비난되고, “화장 없는 거리는 여성미의 신체제”이며 “미용원도 모르고, 구경도 잘 안 다니고, 옷가지에도 별로 탐을 내는 일 없이, 어머니를 도와서 가사에만 부지런”한 여성이 전쟁을 하는 시국에 적합한 “국책형 규수”로 칭송되었다. 여성의 성적인 매력을 드러내는 외모는 여성 개인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 해를 끼치는 “반국가적, 반사회적, 반전적”인 행위로 간주되었다.

– 안태윤, 앞의 글
화장과 파마가 ‘시금석’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여성이 외모를 꾸미는 일은 성性과 연관되고, 이것은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의 저자인 일본의 사회학자 우에노 치즈코는 이 책에서 여성혐오 양상을 설명하기 위해 ‘성의 이중 기준’과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에 대해 설명한다.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들은 ‘남성에게는 자유로운 성도덕 : 여성에게는 정조 관념’이라는 이중 기준을 성립시키기 위해 정숙한 여성(성녀)와 문란한 여성(창녀)라는 대립항을 관념적으로 만들어 내게 되고, 이것이 여성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을 만드는 근본적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들은 여성에 대한 왜곡된 관념을 갖게 되는데, 이는 숭배할 만한 여성(성녀)에 대한 숭배와 혐오해도 마땅한 여성(창녀)에 대한 혐오이며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리고 이런 왜곡된 관념이 여성을 성녀인지 창녀인지 가려내기 위한 불합리한 기준들을 만들어 낸다. 인용구에서 우리는 전시 체제에서는 파마나 화장을 그 기준으로 사용하며, 남자들은 전쟁을 하러 나선 시국에 화장을 하며 외모를 가꾸는 여성은 “사회의 안정에 위협이 되는” “창부와 같”다고 폄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짙은 화장이나 특정한 옷차림은 학교 밖 사회에서 ‘술집 여자 같다’고 백안시되는 대상이다. 사회적으로 여성이 외모를 꾸미는 적절한 정도에 대한 암묵적 기준이 있는 것이다. 이 암묵적 기준이 학교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화장과 파마·염색의 여부를 통해 ‘노는 아이’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바뀐다. 학교에서도 과거에는 화장을 짙게 한 학생이나 파마·염색을 한 학생에게 교사가 ‘술집 여자 같다’라는 비난을 퍼붓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화장이나 파마·염색을 한 학생이 문제 학생이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여학생에게 화장이나 파마·염색을 금할 때 등장하는 ‘학생다움’이라는 기준은, 학생들은 (성적 매력을 드러내도 괜찮은 나이인) 성인 여성과 구분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흔히 교사들이 충고인 것처럼 말하는 “너희들은 맨 얼굴일 때가 제일 예뻐”라는 말은 (화장을 더 잘하라는 의미로 빈정대기 위한 말이 아니라면) “맨 얼굴에서 보이는 10대다움이 학교에 걸맞다”, “화장을 통해 성적 매력을 드러내려는 행위는 학교에 걸맞지 않다”라는 말이라고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을 또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동시에 일제 화장품 광고는 계속되었는데, 이런 광고는 여성의 성적 매력을 드러내는 화려한 화장을 제재하는 국책에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건강미와 청결, 사용의 간편함과 경제성을 호소하는 데 치중했다. 물자 부족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자신의 외모를 ‘여자답게’ 보이도록 가꾸어야 하며, 이러한 화장품이 여성의 외모를 효과적으로 아름답게 유지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 안태윤, 앞의 글
‘여자답게’를 추구하는 일은 ‘총력전’ 체제에서도 여전히 미덕이었다. “창부와 같은 분위기”를 보이는 화장을 금했던 조선총독부도 ‘여자답게’ 가꾸는 일은 금지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여자는 나쁜 여자가 되려고 해서도 안 되지만 ‘여자’이기를 포기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인데, 이는 상대방을 익숙하고 고정된 이미지에 가두는 전형적 타자화다. 소수자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개인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소수자 집단의 일부로서만 받아들여지며, 그 이미지에 들어맞지 않은 경우 공포 또는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동할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장애인, 보호 받기를 거부하는 청소년, 그리고 여성스럽기를 거부하는 여성 등 고정된 이미지를 벗어나고자 하는 소수자가 나타나면 사회는 언제나 그들에게 주어지던 최소한의 배려와 예의마저 거두어 가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여자애니까 내버려둬”라는 논리로 여학생의 외모 꾸미기 규제를 반대하는 교사들의 논리도 마찬가지이다. “여자애들이 립스틱 좀 바르는 게 어때서”, “남자애들하고 같이 있는데 귀걸이도 좀 하고 싶겠지”, “어차피 나중에 할 거니까 내버려둬”라는 식이다. 외모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이유가 아니라, “여학생이니까” 외모 가꾸기를 허용해야 한다는 시각은 여자가 여자답게 꾸미는 것은 미덕이라는 관점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런 논리는 마치 여학생으로서의 특수성을 인정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쉽게 ‘여자답지’ 않은 여학생에 대한 힐난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역시 여성혐오와 연결된다.

여성혐오와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재생산하는 생활지도

위에서 지적한 구태의연한 모습들의 생활지도가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여학생들의 외모꾸미기는 그들의 학교생활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 많은 학생들이 교실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교실에서 잠을 자는 오늘날의 학교는 학생들의 또 하나의 집이자 사회이고, 숙식 공간이자 사교 공간이기에, 학생들은 아주 영리하게 학교생활의 빡빡한 시간과 공간을 이용하여 외모를 꾸민다. 짧은 쉬는 시간을 이용해 비비와 틴트를 덧바르고, 수업 진행을 위한 전자기기들의 전기 코드를 콘센트에서 뽑는 대신 고데기를 꽂아 머리를 단장하며, 점심시간의 사교 생활을 위해 수업 시간에는 ‘구루프(헤어롤)’를 만다. 책상 위에 손거울로 수시로 화장을 점검하고, 친구와 화장품을 알뜰하게 소분하여 나누어 쓴다. 교복을 짧게 수선하여(속칭 ‘짧치’) 필요한 때에 자신을 꾸미는 데에 사용한 후 필요한 기간이 끝나면 그것을 다시 필요한 학생에게 SNS 등을 통해 판매하여 용돈을 마련하기도 한다.
이렇듯, 외모를 꾸미고자 하는 학생들은 단정함과 정숙함을 요구하는 생활지도에 대해 비판하기보다는 적당히 따르고 적당히 무시하면서 학교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어차피 교사들과 어른들이 요구하는 정상적 복장의 기준 ― 단정함과 정숙함 ― 은 세상에서 통용되지 않는 한시적인 기준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학교에서 정숙한 옷차림을 강제한다면 그에 대한 반작용은 정숙하지 않은 옷차림이다. ‘정숙한 옷차림 = 통제 : (미디어 속의) 노출이 따르는 화려한 옷차림 = 자유’라는 대립항이 이 학생들을 지배한다. 단정함과 정숙함을 요구하는 학교교육은 이 학생들이 추종하는 화려한 옷차림이 미디어 속 섹스 심벌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에 발끈하지만 그 요구와 분개는 학생들에게 통제당한다는 답답함을 안겨줄 뿐 ‘삼촌팬’으로 상징되는 10대 여성의 성 상품화 현상에 대한 비판 의식으로 연결되지는 못한다.
외모 가꾸기는 ‘학생으로서의 일탈 행위’라고만 학습할 뿐 여성의 성 상품화, 성적 대상화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배우지 못한 학생들은 이렇게 결국 여성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내면화하게 된다. 교사들의 규제 아닌 규제가 이어질 수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 규제의 내용들이 오늘날의 학생 사회의 일반적 윤리 기준에 부합한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학생들은 스스로 외모 가꾸기를 자기 표현 방법으로 일상화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일탈 행위라는 기준도 함께 내면화하고 있다. 학교교육에서의 일탈 행위에 대한 기준은 학생 사회 내부의 윤리 기준을 마련하는 데에도 유사하지만 느슨하게 모방된다. 그 기준은 ‘노는 애’ 혹은 ‘좀 이상한 애’를 구분해 내고, 다른 학생을 모함하고 공격하기 위한 구실로 사용되기도 한다. 교사들이 일탈 행위로 규정하는 것이 자신들이 싫어하는 학생에게서 발견된다면 그것이 자신이 그 학생을 공격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학교폭력의 피해자들을 두고 가해자 학생들이 했던 말들 중 관련된 것을 모은 것이다. ‘맨날 거울만 보는 게 꼴 보기 싫어서’, ‘여자애가 너무 더러워서’, ‘화장을 해도 해도 너무 해서’, ‘몰래 화장품 가져와서 자랑하는 게 싫어서’…….
또 교복 치마의 길이를 규제하고 여름에 다리를 오므려 앉도록 잔소리하며 속옷을 갖추어 입게 지도하는 등 여성에게만 가리고 감추는 정숙함의 미덕을 강조하는 현 중·고등학교의 생활지도 방침은, 여성이 몸을 내보이는 것은 자칫 성적인 의미를 띠고 또 교실 내에서 불필요한 성적 자극을 유발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성추행과 성폭력 사건에서 문제를 유발하는 것은 여성의 몸이라는 잘못된 관점을 전제한 지도 방침이다. 이런 복장 규정이 존재하고 이 규정에 의해 지도하는 학교에서 자라난 학생들은, 남성이 여성의 신체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일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메시지를 전달받는 셈이고, 동시에 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성과 관련된 문제가 생겼을 때에 신체를 노출한 여성이 오히려 처벌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학습하고 있는 셈이다. 동시에 이런 교육은 여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몸을 부끄럽게 여기고 가려야 할 대상으로 끊임없이 의식하게 만들고, 몸가짐을 자연스럽게 가지지 못하는 것이 여성으로서는 당연하다는 것, 여성이라면 몸가짐을 바르게 하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고 있다.

몸의 노출 검열에 반발한 미국 여고생들

작년 10월, 미국 켄터키 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한 여학생이 복장 규정 위반으로 집으로 돌려보내지는 일이 있었다. ‘쇄골이 노출되는 티셔츠를 입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귀가한 학생은 스카프로 쇄골을 가린 차림으로 다시 등교했으나 ‘태도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다시 되돌려 보내졌다. 학부모의 항의에 학교 교장은 애초의 학생의 복장이 규정에 어긋나는 복장이라 귀가시킨 것이라고 설명하며 “그런 복장은 남학생들의 시선을 끌어 집중을 방해한다”라는 해명 아닌 해명을 했다. 당사자 학생이 페이스북에 올린 그날의 차림을 찍은 사진으로 사건은 큰 관심을 끌었고 학교의 복장 규정dress code이 불합리할 뿐만 아니라 성차별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영상이 제작되고 해시태그 #IamMoreThanaDistraction를 달아 학교 규정을 개정할 것을 요구하는 여학생들의 캠페인이 번져나갔다. 여학생에게만 해당되는 복장 규정 ― 쇄골이나 어깨가 보이는 상의를 입는 것, 그리고 무릎 위로 올라가는 하의를 입는 것, 속옷이 노출되는 것이 금지되어 있음 ― 을 가진 학교들에 대한 고발이 잇따랐고 이런 규정은 여학생의 몸을 ‘조심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성차별적 시선이 반영된 결과라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이 결국에는 성폭력 사건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는 잘못된 문화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또 지난 6월에는 몬태나 주의 한 고등학교 여학생이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무실에 불려갔던 일이 알려졌다. 브래지어 착용에 대해 규정에서 강제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교사는 ‘용모 단정’이라는 규정을 어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학생들은 속옷의 착용 여부를 학교에서 강제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는 ‘No Bra, No problem’ 운동을 페이스북을 통해 벌이고 있다. 이 캠페인에 동의하는 학생들은 속옷 착용에 대해 규제하는 것은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여학생에 대해서만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차별적 방침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얼마 전 문구점에서 최근 잘 팔리는 노트와 필통 등에 쓰여 있는 문구가 화제를 끌었던 적이 있다. “10분만 더 공부하면 남편/아내의 직업이 바뀐다”, “열공해서 성공하면 저 남자가 내 남자다”, “그 얼굴에 잠이 오니” 등이 선정적 필체로 그려져 있는 문구 용품들이었다. 얼마 후에는 그 제품들을 해외의 제품들과 비교한 이미지가 〈여성신문〉을 통해 보도되었다. 거기에는 역도를 들고 있는 어머니 그림이 그려진 어머니날 축하 카드, 여자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적힌 노트 등이 실려 있었다. 위의 두 사례를 접하면서 비교적 평등하고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미국 학교의 구태의연한 복장 규정의 내용도 놀라웠지만, 학생들이 교사들의 지도에 반발하는 저항 담론에 자연스럽게 ‘성차별’이라는 언어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과 저들의 저항이 학부모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그들의 복장 규정은 구태스러우나, 학생 사회의 언어에 여성주의적 시선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미국 사회 전반에는 그리고 미국 교육의 언어에는 여성주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여성혐오가 이슈가 될 수 있는 것은 여성혐오적 사회 현상이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를 비판할 수 있을 만큼 여성주의 언어가 우리 사회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떤 교원 단체도 강남역 살인 사건에 대해 입장을 발표한 적이 없으며 여성혐오라는 ‘핫’한 이슈에 대한 수업 사례가 적극적으로 소통되고 있지도 않다. 이제는 학교 차례다. 여학생의 외모 가꾸기를 단속하고 노출을 규제하는 학교가 아니라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에 맞서는 담론을 유통시키는 학교, 여성의 성 상품화와 성적 대상화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함께 읽어내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여성혐오적 시선으로 친구를 재단하고 손가락질하게 만드는 학교, 무작정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하는 학교가 아니라 성차별적 맥락을 읽어 내고 이에 저항할 수 있는 발화를 가르치는 학교가 필요하다. 지금, 서둘러야 한다.
* 우완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의 활동회원이시며, 이 글은 교육공동체 벗에서 발행하는 <오늘의 교육> 33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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