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날다] 민주적 조직 운영을 위한 고민들
“대표가 없는 조직은 민주적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세상을 바꾸는 것과 관련하여 내가 좋아하는 비폭력의 원칙 중 하나는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이다. <멋진 신세계>의 작가로 주로 알려진 영국 태생의 작가 울더스 헉슬리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한 평화주의자이기도 했다. 세계 양차대전을 경험하며 “전쟁은 평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사람들은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에 대해서 말하지만, 전쟁을 끝내기 위한 평화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는 그는 1937년에 출간한 <목적과 수단(Ends and Means)>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좋은 목적은 적절한 수단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단의 정당함이 목적의 본질을 입증해주기 때문이다.”

목적과 수단에 관한 헉슬리의 지적은 운동 사회의 비민주성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운동의 대의가 민주적이지 못한 운동 방식을 정당화해주는가 하는 질문이다. 모두가 평등한 민주주의를 함께 꿈꾸는 조직 내에서 정작 비민주적인 일들에 직면할 때 사람들은 자기 활동의 의미에 대해 곱씹어보게 된다.

왜 조직의 대표들은 활동가들의 문제 제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국은 활동가들이 떠나거나 기존 조직을 사실상 와해하는 결말로 치닫는 것일까,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실제 일하는 관계에서도 서로 평등하게 즐겁게 일할 방법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이 “생명력 있고 매력적인 조직 만들기 인권교육 워크숍”에 참여한 나의 문제의식이었다. 처음 모인 자리에서 “어떤 이유로 참석했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대표가 시켜서 왔다”는 답변에 대해 서로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그 대답 자체를 곱씹어볼 수 있는 분위기 속에 워크숍은 시작되었다.

조직 안의 민주주의 진단 체크리스트를 만들다

활동가들 사이에 장애 유무가 업무역량의 차이로 드러나는 조직과 그렇지 않은 조직, 대표가 있는 조직에서 대표, 사무국장, 평활동가로 일하는 조직과 그렇지 않은 조직의 활동가들까지 워크숍 참가자들의 경험과 입장은 다양한 층위로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조직 내 민주주의 진단 체크리스트”에 대해 원론적 수준에선 다들 동의하였지만, 구체적으로 동의하는 이유를 모둠별로 적고 발표하는 과정에서는 미묘한 견해 차이를 보이는 부분들도 있었다.

같은 문장에 대한 다른 해석이 나온 체크리스트 중 하나가 “말한 사람이 책임져”였다. 자신이 새로운 제안을 꺼냈는데 그에 대한 생산적인 토론이 뒤따르기보다는 “말한 사람이 책임지라”는 논리 속에 자신의 업무 부담만 늘어나는 결과를 경험하다 보니 결국 이후에는 아이디어를 말하는 것 자체를 꺼리게 된다는 지적이었다.

그런데 위의 말에 대해 다른 방향에서 문제제기를 한 참여자도 있었다. 제안자(대표)와 실행자(활동가)가 다른 경우가 많은 조직에서는 오히려 저렇게 제안을 꺼낸 사람, 즉 대표에게 이후 실무까지 책임을 지라고 말을 하고 싶어질 때도 있다는 것이었다. 대표가 어떤 사업에 관한 아이디어를 꺼냈는데 실제 일은 맡는 건 활동가들이다. 대표는 항상 바쁘시다. 이런 상황에서 열심히 꾸역꾸역 일을 진행해놨더니 나중에 대표가 왜 그렇게 일 처리를 했냐고 한다거나 원래 자기가 의도한 사업방향은 이게 아니었다는 식으로 맥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말한 사람이 책임져”라는 논리는 활동가들 견해에서 “재수 없는 대표”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었다.

조직 내 민주주의 진단 리스트

참여자들이 빙고게임으로 찾은 조직 내 민주주의 진단 리스트

참여자들이 빙고게임으로 찾은 조직 내 민주주의 진단 리스트

조직민주주의 리스트에 의견을 단 모습

“중요한 사람”은 누구이고 “중요한 안건”은 누가 정하는가

둘째 날에는 연극을 보고 그 상황에 직접 개입해봄으로써 민주적 조직문화를 일구어내는 데 필요한 변화의 요소를 함께 찾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상황에 대한 통찰을 돕기 위해 미리 정해진 역할에 맞는 대본을 가지고 연극이 진행되었다. 연극을 본 참가자들은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자신이라면 어떻게 다르게 대처했을 것 같은지 직접 배우가 되어보면서 토론을 이어나가는 방식이었다.

연극의 상황 중 대표가 갑자기 개인 사정이 생겨 사무실에 나올 수 없다고 전화하니 사무국장이 활동가들과 상의 후 회의일정을 대표의 시간에 맞춰 옮기는 설정이 있었다. “대표가 없다고 회의 시간을 바꾸거나 취소할 때”는 전날 다룬 체크리스트에서도 언급된 바 있는 부분이었다.

조직내 민주주의 워크샵

토론연극으로 풀어 본 조직민주주의

내가 전에 일하던 조직에서는 매주 월요일 정기운영회의가 있었다. 그런데 대표나 (실질적) 사무국장이 교육이나 출장 등의 이유로 회의에 참석할 수 없는 날에는 회의가 취소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한번은 아예 지난 1년간 일정표를 뽑은 뒤에 회의가 열렸던 날의 참석자 명단 그리고 열리지 않은 날에 대표와 사무국장 등 “주요 인사”들의 일정이 어떠했는지를 따져본 적이 있었다. “우리 공동체는 모두가 1/n 만큼의 영향력을 가지는 평등한 조직이다.”라고 되돌아오는 논리를 통계로 반박해주고 싶은 묘한 집착의 발로였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대표와 사무국장 모두가 사무실에 없는 날에는 회의가 열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대표 없이 사무국장만 있을 때 회의를 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그 자리에서 “중요한 안건”은 다뤄지지 않았다. “대표도 회의 결정 사항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대표도 있는 자리에서 다루는 것이 좋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우리는 다 같이 평등하다고 하면서도 의사결정에서는 대표에게 권한이 집중된 평등하지 않은 조직문화에 대한 문제 제기를 꺼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은 여전히 “우리는 모두가 1/n이다”는 공허한 말 혹은 “우리가 기존 지배체제의 권력관계에 물들어 있어서 자꾸 대표에게 힘을 넘겨주려고 해서 문제다. (그러므로 직원들이 더 평등한 인간관계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라는 가르침이었다. 내가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을 때에 “오늘은 날맹이 없으니 회의(혹은 “중요한 안건” 다루는 것)를 나중에 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가 나왔다는 걸 들어본 기억이 없다.

“나는 대표의 시다바린가?”와 “대표가 있으면 편하긴 하지” 사이에서 – ‘헌신권력’을 넘어서기

워크숍이 진행될수록 자신이 지금 일하고 있는 조직에서의 모습들을 되돌아보게 되고 어느 순간에는 “그럼 대표란 제도를 없애야 하는 걸까”하는 질문에 이르게 되었다. 마침 한 참가자가 “대표가 없는 조직의 장점과 한계는 무엇일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던졌다. 자신은 늘 대표가 있는 조직에서만 일 해봐서 대표 없는 조직의 모습을 잘 상상하기 힘드니 경험담을 듣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흥미로웠던 것은 이 분을 비롯해 꽤 많은 참여자가 한편으론 조직의 비민주적인 측면에 문제의식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래도 대표가 있으면 좀 부담스러운 일도 떠넘길 수 있고 솔직히 편하긴 하지”하는 일면 모순된 생각을 보였다는 점이다.

단순히 대표 한 명의 유무로 조직의 민주성을 논하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 우리 단체 하면 외부에서 대표 한 명만 떠올리는 것이 문제라 생각하면서도 막상 지금 당장 그 대표가 없어지면 이 조직 자체가 망해버리진 않을까 우려가 들기도 한다. 보통 대표들은 단체의 창립 때부터 활동해온 경우가 많고 그만큼 조직에 대한 애정과 헌신의 측면에서 갓 들어온 활동가들과는 비교하기 어렵기 때문에 조직의 민주주의와 관련한 문제제기를 하기가 애매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조직 안에서 누군가는 재미나 활력 없이 그저 버티는 정도로 일하고 있다면 아무리 거창한 대의를 위하고 있다 할지라도 이 단체는 그저 공허한 운동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애초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큰 꿈을 품고 들어왔다가 막상 조직의 분위기나 의사결정구조에 지쳐서 활동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떨어지는데 그런 사람에게 넌 왜 운동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없느냐고 묻는 건 선후관계가 바뀐 질문이다. 애정을 주기 어려워졌기에 관심도 사라졌는데 그걸 지적하며 발언의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거나 자신은 지금도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지를 말하는 식으로 정당성이 확보되는 것을 ‘헌신권력’이라고 부르고 싶다. 헌신의 정도로 조직 내 구성원 간의 암묵적인 권력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젊은 활동가들은 “우린 헌신 따위 하지 말자”며 이 헌신권력의 프레임 자체를 거부하는 논리를 만들기도 한다.

“수단은 씨앗, 목적은 나무”

민주적인 조직을 만드는 것은 개인의 변화와 구조의 변화 중 무엇이 먼저인가 하는 이분법을 넘어선다. 한 참가자가 날카롭게 지적한 것처럼 대표의 위상과 역량이 곧 조직의 역량과 직결되는 (결과적으로 대표 중심의 비민주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조직일수록 “대표 자체가 곧 구조”일 확률이 높다. 대표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지난 시간 활동의 결과로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가 다른 활동가들과 공유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남기보다 그런 역량들이 대표 개인의 몸에 “육화”되어버린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대표가 물러난다고 순식간에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중요한 것은 ‘대표’라는 직책의 유무보다는 권한과 책임을 공유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민주적인 조직으로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생각보다 버겁고 어려운 일이다. 민주주의란 것 자체가 시끄럽고 힘든 과정이란 걸 수용한다면 자신의 가치와 실제 삶의 방식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이 일련의 시간을 좀 더 기꺼이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정리강연에서도 언급된 바와 같이 “우리 자신이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미래의 매력적인 현재가 되어야 한다.” 저항에 있어 수단과 목적의 관계에 대해 간디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수단은 씨앗에, 목적은 나무에 비유될 수 있다. 즉, 수단과 목적의 관계는 씨앗과 나무 사이의 관계와 동일하다.” 자신이 꿈꾸는 세상에 대한 지향과 이를 위해 일하는 곳의 운영방식이 일치하는 것. 내가 원하는 세상의 원리대로 지금 삶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럴 때 개인과 조직 모두 지속 가능한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 날맹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회원)

*출처: 인권오름 제 386 호 [기사입력] 2014년 0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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