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인권’과 ‘자립’의 만남, 첫 물꼬를 트다
<함께 걷는 아이들> 재단 ‘위기’ 청소년 지원사업 참여기관 실무자들과의 1박 2일 숙박 워크숍을 마치고

‘인권교육의 생명력은 인권 현장에 대한 감각을 통해 일깨워지므로 강의나 수업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현장 활동도 함께 참여합니다.’ 인권교육센터 ‘들’의 교육 및 활동원칙의 첫 번째 문장이다. ‘들’의 활동가들은 교육을 매개로 인권운동을 하며, 그렇기에 교육 참여자와 단순히 ‘강사’와 ‘수강생’으로 관계 맺지 않는다. 늘 현장성을 반영해 교육 프로그램을 짜려 노력하고, 현장 활동의 맥락에서 교육 의뢰를 받기도 한다.

‘들’이 주요하게 관계 맺고 있는 현장 중 하나는 청소년 영역이다. 약 2년 전부터, 거리 청소년(흔히 가출/비행 청소년이라 불리는 존재들)을 지원하는 ‘움직이는 청소년센터 EXIT’와 교류를 해왔고, 몇 차례의 교육*을 통해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아왔다. 서로 마음이 닿아 알게 된다는 건, 서로 기대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EXIT의 한 활동가로부터 ‘2015년에 시작되는 위기 청소년 지원사업을 모니터링 하고, 청소년 자립 개념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함께 수행할 수 있을지’ 제안 받게 된 건 그런 점에서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동안 ‘들’이 해왔던 일의 경험과는 사뭇 다른 결의 고민을 요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임활동가들은 긴긴 논의를 진행했다. 고민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일까’(이른바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 곱씹은 경험이 그리 깊지 않다는 점), ‘들에 어떤 의미를 남길 수 있을까’ (교육을 주요 활동으로 삼고 있는 ‘들’이 사업 참여 기관들을 꼼꼼히 지원하고, 네트워킹 하고, 자립 개념과 자립 모델을 연구하는 일련의 ‘빡센’ 과정을 내실 있게 추진할 수 있는지 여부)를 몇 차례에 걸쳐 토론했다. 새로운 역할과 활동 방식이 낯설고 두렵지만, ‘들’이 그동안 걸어온 여정 속에서 만난 인연과 그에 따른 도전을 소중히 하자는 것이 상임활동가들이 맺은 결론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사업 수행을 해보자 결심했고, 운영회의를 통해 ‘들’의 2015년 사업 중 하나로 채택했다. 품이 많이 드는 일인 만큼 상임활동가 2인(한낱, 날맹)을 담당자로 배치했고, ‘들’의 활동회원이자 청소년 활동가인 공현이 사업 코디네이터를 맡았다. 안식년을 맞은 상임활동가 개굴이 연구 영역에서 일정 역할을 맡기로 했고, 그간 빈곤 청소년 연구를 해온 활동회원 호연과 청소년 관련 법률 지원을 하고 있는 활동회원 차연이 팀원으로 참여했다. 지원사업의 명칭이 ‘자몽(自夢, 자립을 꿈꾸다)’인 만큼, 우리는 그 꿈이 튼실하게 여물도록 지원한다는 맥락에서 ‘몽실(夢實)’이라 팀 명칭을 확정하고, 새로운 실험으로의 항해를 시작했다.

2015년 1월~2월 사이, 서류심사/현장심사/최종 심사를 거쳐 총 7개 기관이 참여기관으로 선정되었다. 더불어 위에서 언급한 EXIT 역시 <함께 걷는 아이들> 재단에서 유사한 맥락으로 사업을 계속 진행해왔던 터라 참여기관들과 ‘들’의 교육 및 네트워킹 모임에 함께하기로 했다. 참여기관은 청소년 생활시설, 청소년 자립 훈련 매장, (학교 밖) 청소년 지원 및 생활공간, 보호관찰소 등 다양했다. 위기 상황에 내몰린 청소년들을 지원해온 방식/내용/관점의 스펙트럼 역시 다양했다. 사업 협약식 때 잠시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서로를 알 수 있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던 터라 첫 만남은 1박 2일 숙박 워크숍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본격적인 사업 진행에 앞서 어떤 관점으로 청소년을 바라보고, 청소년의 자립을 지원할 것인지 그 토대를 마련하는 자리로 기획했다. 전체 워크숍 일정은 아래와 같이 진행했다.청소년인권과 자립의 만남

누가 누가 왔나 – 서로 소개의 시간

참여기관(각 기관마다 평균 2명), <함께 걷는 아이들> 재단, ‘들’의 몽실 팀 총 20여명이 모여 워크숍의 문을 열었다. 아직은 서로 어색하고, 서먹한 시간. 몸을 충분히 움직이며 할 수 있는 놀이를 통해 마음의 빗장을 여는 시간을 가장 먼저 가졌다. 이어서 ‘나는 ~한 버릇이 있는 ○○입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청소년들에게 ~한 사람이고 싶은 ○○입니다.’ 두 문장을 채워 서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청소년들에게 ‘구라’를 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청소년들에게 ‘진솔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씀하신 분의 이야기에는 다들 웃음이 번지기도 했다. 살면서 (두 번은 아니고) 한번 쯤 생각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의 의미를 추적하며, 청소년들의 삶을 지배하기 보다는 그저 의미 있는 한 사람으로 남고 싶은 마음을 서로 나누기도 했다.

위기 ‘청소년’과 ‘위기’ 청소년- 청소년의 삶과 인권

몽실1본격적인 워크숍은 청소년 인권 교육으로 시작했다. 인권의 관점으로 청소년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충분히 나눌 수 있길 기대하며 약 3시간 30분 정도 대화를 나눴다. 존재 혹은 그 존재의 삶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이 인권감수성의 핵심임을, 그럴 때에야 비로소 ‘위기 청소년(비행 청소년)’이라는 꼬리표를 떼어 냄과 동시에 그 청소년이 경험하고 있는 위기적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음을 여는 강연을 통해 강조했다.

다음은 청소년을 바라보는 관점을 살필 수 있는 몇 가지 OX 질문을 바탕으로 각자의 입장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아이들이 착한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때려서라도 가르칠 건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청소년은 미숙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쉽게 휩쓸린다.’, ‘학생인권이 보장되면 교권침해가 늘어난다.’와 같은 문장을 제시하고 모둠별로 돌아가며 각자 OX판을 드는 식으로 진행했다.

몽실워크샵-위기청소년인권▲ ‘착한 며느리’, ‘착한 노동자’, ‘착한 어린이’ 등 ‘착함’을 요구받는 존재들은 기실 권리를 박탈당한 존재들이 아닐까? ▲ ‘때려서라도 가르칠 것이 있다’고 했을 때 그 내용과 가치는 무엇인가? 그 가치가 제 아무리 중요하다할지라도 폭력적인 방식으로 사람의 성장을 이끄는 것이 가능한가? ▲ 청소년은 미성숙한가, 미성숙해지는 것인가? ▲ 학생/청소년인권의 보장은 관계 맺기에 있어 어떤 다른 그림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등을 토론했고, 토론하는 내내 참여자들은 서로의 경험을 반추하며 관점을 교류했다.

교육 참여자들의 마음이 여러 가지 생각들로 일렁일 즈음, 보다 현장 밀착적인 질문을 던지기 위해 다음과 같은 프로그램을 이어서 진행했다. 아래과 같이 상황 설정을 제시하고, 그 상황 속에 참여자를 직접 초대해 즉석 역할극을 실행했다.

[상황 1] 우리 기관을 이용하는 한 학생이 학교를 자꾸만 지각하거나 결석한다.
나는 어떻게 이 상황을 마주할 것인가?

참여자들의 실제 습관이나 고민이 여실히 드러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OX 토론에서 미처 다 풀어내지 못한 속마음을 꺼내어 이야기할 수 있었다. ‘학생들이 학교를 싫어하고, 학교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학교라도 가야 최소한의 사회적 자원과 위치를 확보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 앞에 ‘이것이 대안이오.’라고 뚜렷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억압적인 제도를 감내하며 어떻게든 졸업장이라도 받을 것인가’ 아니면 ‘황무지 같은 제도 바깥에 머물며 소외와 배제를 경험할 것인가’ 이 둘 모두는 선택할 수도, 선택해서도 안 되는 이분법일 뿐임을 확인했다. 차악도 아닌, 최악일 뿐인 선택지를 청소년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는 것을 씁쓸해하며, ‘비빌 언덕’으로 기능할 수 있는 자립의 ‘장소’를 만드는 일이 소중함을 공감했다. 그러한 장소를 만들기 위한 몇 가지 실험들을 소개하고,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갈 자립의 개념에 담겨야할 주요한 가치들을 강조하는 정리강연을 간략하게 이어갔다.

잔혹극 : 무엇이 청소년을 위기로 내모는가?

저녁 시간에는 호연의 진행으로 “위기청소년 지원사업”을 한다고 했을 때 ‘위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구체적으로는 무엇이 청소년을 위기로 내모는지에 대한 질문과 고민을 나누는 시간이 이어졌다. 두 청소년의 이야기가 나온 사례지를 읽은 뒤 각 존재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을지를 모둠별로 찾아보았다. 이를 위해 ‘위기’ 상황과 연결할 수 있는 ‘빈곤’이나 ‘폭력’과 같은 키워드들을 적어보는 작업도 병행되었다. 그런 뒤에는 연극적 방식으로 가상의 두 청소년을 앞에 두고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대화를 진행했다.
사례 속 청소년으로 빙의한 이를 앞에 두고 이어진 대화는 참여자들이 생각한 만큼 쉽게 진전되지 않았다. 어떤 일상을 보냈는지 궁금하고 걱정된 마음을 담아 물어보지만 청소년의 대답은 “왜 자꾸 꼬치꼬치 물어보는데요. 말하면 다 들어줄 거예요?”였다. “이야기해줘서 고맙다”는 실무자의 얘기에 청소년은 “내가 얘기해 준 게 뭐가 고맙지?”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한 청소년은 아마도 상대가 정말 자신의 삶을 궁금해 해서 물어보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물어보는 건지를 분별할 수 있는 촉을 지난 자신의 삶을 통해 체득한 것이리라.무엇이 청소년을 위기로 내모는가

호연이 교육 속에서 했던 말처럼 자신의 얘기를 꺼내는 행위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지금 내 앞의 상대와 대화 상황에 대한 복합적인 판단을 거친 뒤에야 가능하다. 특히나 나를 솔직히 노출했을 때 보통은 비난받기 쉬운 삶을 사는 이들에겐 더욱 더 상대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그리고 내 얘기를 들을 만한 사람인지 간을 볼 수밖에 없다. 또 하나, 실무자들은 청소년이 자기 이야기를 꺼내주길 바라지만, 실무자 본인이 얼마나 연결과 공감의 의도로 대화에 임하느냐와 별도로 청소년 본인이 자기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가도 중요한 부분이다. 가슴 속 빡치거나 답답한 이야기들이 있을 때 내 얘기를 상대가 들어줄 깜냥인지 살피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일어난, 그러나 쉬이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을 해석하여 하나의 서사로 구성할 수 있는 자기 힘(논리 혹은 언어)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자기 말을 할 수도 있다는 얘기들을 교육 속에서 나누었다.
“주장할 것이 없는 사람, 주장이 없어도 되는 사람은 글을 쓸 필요가 없다.”고 정희진은 말한다. 지금 삶에 불편함이나 아쉬움이 없는 사람은 주류 질서와 일치된 몸을 가진 존재들이다. 반대로, 같은 이유에서, 약자들은 “말이 많다.” 자신이 겪은 부당함을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하기 때문에 약자는 부단히 말해야 하고 자연스레 이중언어(biligual)를 갖게 된다. 이미 내 삶을 설명하지 못하는 바로 그 언어를 사용하여 상대를 납득시켜야 하는 역설적 상황에 놓인 것이다. 당연히 상대로부터 숱한 오해와 거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경험에 대해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새로운 해석의 틀을 찾는 것은 그래서 고단하다. ‘위기적 존재’로 내몰린 청소년들이 스스로를 긍정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선 ‘내 얘기를 들어주고 믿어줄 내 편’이 있다는 관계와 세상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위기청소년 자립지원사업’을 통해 만나는 청소년들과의 관계에서 인권적 관점을 논한다는 건 따라서 그이들에게 ‘내 편’이 있다는 믿음을 어떻게 줄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거인’을 만드는 사회

이어진 둘째 날 오전 교육시간에는 김태용 감독의 <거인>을 함께 보았다. 각자 가진 관점이나 입장의 차이와 무관하게 어쨌든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이기에 영화 속 장면들을 서로 어떻게 읽었는지 감상과 해석을 나누는 과정에서 유의미한 토론이 될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가 있었다. 영화를 본 뒤에는 다음의 질문을 가지고 함께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가졌다.

* 청소년 지원 현장에 저런 사람 꼭 있다!
*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영화 속에서 바꾸고 싶었던 상황이나 장면 (등장인물들의 발화/선택/행동 중 이해할 수 없거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 청소년 자립을 고민할 때, 이 영화는 이런 영감을 줄 수 있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참여자들은 영화 속 현실에 푹 잠긴 모습이었다. 각자 자신이 그동안 현장에서 만났던 청소년들의 모습, 그이들과 만났던 자신의 모습들을 떠올리면서 영화 속 주인공의 삶의 궤적에 압도되고 먹먹해하는 분들이 많았다.

일하지 않고 교회를 전전하며 받는 지원금으로 근근히 생활하는데 이젠 남은 둘째 아들마저 이미 첫째가 있는 그룹홈으로 보낼 방도만 고민하는 아버지, 일하다 허리를 다쳐서 지금은 일도 없고 별거 중인 어머니, 이런 가족으로부터의 지원이나 돌봄에 대한 기대는 애초에 포기한 채 ‘이삭의 집’이라 불리는 그룹홈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여러 어른들의 눈치를 보는 주인공 영재 혹은 요한. 믿을 수 없는 어른들 속에서 영재가 당장 살아남기 위해 택한 주요 전략 중 하나는 ‘신학대에 입학하여 신부가 된다’는 서사를 끊임없이 주변에 납득시키는 것이었다.
영화 속 영재는 “자신을 책임져줄 어른이 한명도 없다”는 이야기를 자주 뱉는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제 한 몸 건사는 스스로 해야한다는 영재의 가치관이 더욱더 강고해지는 것에 반비례해 영재에 대한 그룹홈 원장의 불신은 깊어간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이미 꼬여버린 여러 관계들 속에 궁지에 몰리던 영재는 급기야 식칼을 들고 자해를 하기에 이른다.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턱 하니 막히게 하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영재의 그런 행동이 오히려 너무나 후련하게 느껴졌다고 말한 교육 참여자 분이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눈치를 보고 위축되어 있던 영재가 자기표현을 가장 시원하게 한 순간으로 보였다는 것이었다.
“책임져줄 어른이 없다”는 영재의 말을 떠올려본다면 이번 교육에 참여한 분들은 각자의 현장에서 ‘위기청소년’이라 불리는 존재들을 ‘책임지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때 내가 다른 존재의 삶을 ‘책임진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질문이 떠올랐다.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에 걸쳐 진행될 “‘위기’청소년’지원’사업”을 실제 수행하는 이들과 ‘들’에서 생각하는 청소년을 만날 때의 자세 혹은 인권적 관점을 나누고 싶었기에 이 질문을 더 다뤄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책임과 관련하여 빅터 프랑클은 이렇게 설명을 전개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썼던 그는 삶이란 “인생 쪽에서 던져오는 다양한 물음”에 대해 “내가 하나하나 답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수용소 사람들의 경우에 대입해보면 예컨대 “너는 견디기 힘든 이 굴욕을 견딜 수 있는가?”라고 물어오는 질문에 답해나갈 때 인생의 의미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 물음에 ‘대답한다’는 것은 ‘응답하는’ 것이고, ‘결단하는’ 것이며 또 ‘책임을 지는’ 것이기도 하다.(강상중, <살아야 하는 이유>). ‘책임’으로 번역되는 ‘responsibility’라는 영어가 ‘응답’을 의미하는 ‘response’에서 파생한 말이라는 것에서 ‘대답한다’는 것과 ‘책임을 진다’는 것의 관계를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위기’/‘청소년’으로 명명된 존재들 역시 자기 삶에 던져진 질문에 응답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누군가에겐 ‘문제행동’으로 보이는 삶을 사는 것인데, 이들이 처한 조건이 다른 ‘일반’/‘비청소년’의 그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에 응답할 언어를 얼마나 절박하게 고민하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기존 체제의 언어가 자기 몸에 딱 들어맞는 존재와 기존의 언어로는 도저히 자신의 삶이 설명되지 않는 존재의 차이다.
여기서 다시 빅터 프랑클의 설명을 빌려보자. “인간은 누구나 ‘자극’과 ‘반응’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이 때 한 존재의 삶의 질은 그 선택지가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을 담보하고 있는가와 연결된다. 지금까지의 삶이 비루했다면 그건 존재 자신의 비루함이 아니라 자기가 직면했던 질문과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그동안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언어’의 비루함일 것이다. 따라서 자기 삶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틀(즉, 언어)을 갖고 자신을 긍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과정이기도 하다.
‘자립 지원’이란 관계 설정 속에 청소년을 만난다는 것은 청소년 관련 논문에 흔히 등장하는 경제적, 심리적, 사회적 자립 지원의 차원을 넘어 상대가 자기 삶의 이유와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지원’이라고 할 때 보다 명료한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것 같다. 이 때 비청소년들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냉정(“선택은 너 자유” 혹은 “너 될대로 되라”)과 열정(“내 판단으로 상대의 삶을 미리 해석하는 것”) 사이를 넘어 “기꺼이 네 편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이런 자세는 청소년과 비청소년 사이에만 한정되지 않는, 애정을 가진 관계에서라면 응당 필요한 자세이기도 하다.
자신의 서사를 자기 스스로 구성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내 말을 들어주는 상대와의 밀고당김 속에 내 삶을 설명하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내 편을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신뢰는 엄청난 에너지가 된다. 이런 맥락이 전제되고 나서야 프랑클이 말한 “자극과 반응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내 멋대로의 ‘자유’”가 아닌 “동등하게 의존하는 관계에서의 확장된 ‘자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책임의 의미를 네 편이 되어주는 것과 연결하여 풀어보긴 했지만, 어쨌든 이 또한 하나의 ‘언어’일 뿐 지금도 움직이고 있는 ‘위기청소년’들의 삶과 어느새 다시 미끄러지는 ‘통념’이 될지 모른다. 현장에서 지원 사업을 하는 분들이 경험하는 복잡다단한 관계의 맥락에선 공허한 말장난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으로 이어질 교육과 네트워크 모임에서 실무자와 청소년들을 꾸준히 만나가는 과정을 통해 경험을 공유하고 그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말들을 벼리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런 마음들을 잘 돌보며 다음 모임을 다시 또 준비해볼테다.

*때로는 거리 청소년 당사자들을, 때로는 청소년들을 지원하는 실무자 및 기관 대표자들을 교육하기도 했다.

⁍ 정리 ‖ 한낱⋅날맹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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