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칼럼] ‘김모 씨’와 ‘김모 군’

죽은 이를 호명하는 방식은 사회적 기억 속에 희생자의 자리를 배치하는 일이다. 국가나 체제에 저항하는 삶을 살아온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열사로 부르는 일이 대표적이다. 단원고 희생학생들에게는 2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故)’라는 말을 함부로 붙이지 않는다. 아직 자식의 사망신고조차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유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어서다. 희생학생들은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에서 이 사회의 기억과 책임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여기, ‘김모 씨’와 ‘김모 군’으로 뒤섞여 불리는 한 희생자가 있다. 청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선 구의역 사망 노동자. ‘김모 씨(19)’라는 호명은 10대라는 나이와 ‘씨’라는 존칭어가 결합된, 우리 사회에선 어색한 조합이다. 살아있는 10대에겐 좀체 붙여지지 않는 ‘씨’라는 존칭을 죽음의 무게가 간신히 끌어당기고 있는 모습이다. 반면 ‘김모 군(19)’이란 호칭은 자연스럽다. 열아홉과 ‘군’의 결합은 어린 희생자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낼 최상의 조합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치 않다.

표준국어대사전은 ‘군'(君)을 “친구나 아랫사람을 친근하게 부르거나 이르는 말”로 정의한다. 구의역 사고 희생자를 일컫는 ‘군’이라는 호칭은 희생자의 어린 나이를 부각시키면서, 희생자를 아랫사람으로 배치한다. 희생된 이의 삶 가까이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들이,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며 반말로 애도를 표하는 일은 그 자연스러운 결과다. 희생자에겐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무례한 태도일 수 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나붙었던 어떤 포스트잇에도 희생된 20대의 피해자에게 함부로 ‘너라고 부르거나 반말을 쓰지 않았다.

“청년의 꿈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미안하고, 또 미안합니다.” 지난 7일, 서울시장의 기자회견 내용이다. 3년전 노량진 배수지 수몰 사고로 7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을 때 나온 서울시장의 발언과는 사뭇 차이가 있다.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지 못한 점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켜주는 것’과 ‘지키는 것’의 차이, ‘청년’과 ‘시민’의 차이, ‘꿈’과 ‘생명과 안전’의 차이. 사고의 책임을 묻는 이들도, 책임을 져야 할 서울시장도 ‘열아홉의 꿈’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한 어른’으로서 한 배를 타고 있는 기괴한 풍경이다. 사고의 원인도, 책임 소재도 ‘어른’이라는 모호한 말 속에 묻혀버리고 있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자기 자신과 동료들을 엄호하기도 했던 그의 저항하는 삶은 ‘순수하고 무고한 어린 피해자’의 이미지에 가려진다. 그리고 사건은 위험 업무를 떠맡은 ‘하청노동자’의 죽음이 아닌, ‘열아홉의 꿈’이 짓밟힌 사건이 된다. 같은 지하철에서 같은 업무를 하다 희생된 26살, 28살, 38살의 죽음은 뒷전으로 밀린다.

참혹한 사건에 분노하기는 쉽다. 희생자에게 정당한 자리를 부여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희생자의 나이는 사건을 분석하는 하나의 요소이되, 사건의 본질을 압도해서는 안 된다. 그는 나이가 어려서 죽은 게 아니라, 폭력적 하청구조에 의해 희생된 것이다. ‘열아홉 살 김모 군’의 죽음이 아닌, ‘하청노동자 김모 씨’의 죽음이다.

  • 배경내(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교육희망> 기사입력 2016/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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