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청소년=쯧쯧쯧?] 자존감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2)

왜 수치심인가? 자존감과 수치심의 관계

자존감에 대한 첫 번째 글에서 언급했듯이 이번에는 빈곤, 수치심 그리고 자존감의 관계를 얘기하려고 한다. 그런데 도대체 왜 수치심일까? 사전적 의미로 수치심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이다. 부끄러움은 어떤 일이나 행동에 대해 당당하거나 떳떳하지 못하게 느끼는 감정 상태를 말한다. 일부 학자들은 감정이 개인의 내면에서 유발된다고 보기도 하지만 사실 감정은 개인이 속한 사회의 의미체계와 가치를 반영한다. 여러 상황에서 개인이 어떤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거나 감출 것인가의 문제는 사회적 규범에 의해 구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수치심도 사회적 차원의 문제이다. 특히 개인의 선택이 아닌 경우 가난한 상황은 부끄러워 드러낼 수 없거나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 되곤 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수치심은 자기 존중을 어렵게 하고, 훼손된 자존감이 다시 수치심을 강화시킨다.

동우는 꽤 오랫동안 비닐하우스 촌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가 IMF 이후 회사에서 정리해고 된 뒤 생계를 위해 시작한 사업이 망하고 갈 곳이 없어 가족은 이곳에 들어왔다. 그의 가족은 따로 비닐하우스를 얻을 돈이 없어 고모가 살고 있는 비닐하우스의 방 한 칸을 빌려 살기 시작했다. 그동안 아버지가 돈을 벌기 위해 여기저기 옮겨 다녀 이사를 자주 했기 때문에 동우는 친한 친구들과 헤어져야 했고, 몇 번이나 전학을 해야 했다. 동우는 “학교 갔다 와서 저녁까지 애들이랑 같이 있는 것은 그때(비닐하우스 촌 거주)가 처음이었던 거 같다”고 말했다. 그의 가족이 비닐하우스 촌에 살게 되면서 그의 삶은 불안정한 이주의 삶에서 정착으로, 친구가 없어 외로웠던 생활에서 함께 할 사람들이 생겨 즐거운 생활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는 학교 친구들 앞에서 사는 곳을 말할 수도 없고, 친구를 데리고 집에 올 수도 없다. 반 친구들이 살고 있는 비싼 아파트가 비닐하우스 촌 바로 옆에서 그의 집을 내려다 보고 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올 때 갈림길에서 친구들은 아파트로, 그는 비닐하우스 쪽으로 내려온다. “쪼금 창피하더라구요. 00아파트 쪽으로 가는데 밑에는 비닐하우스니까 그걸 의식적으로 느끼면서 약간 애들한테 안 보여 줄려고 그랬던 거 같아요.” 결국 그는 사는 곳을 질문하는 친구들에게 계속 말을 안 할 수가 없어 비닐하우스 촌에 산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한 친구들의 반응에 안심을 하게 된다. 만약 그때 그의 친구들이 불편한 시선을 보였다면, 무시하는 듯한 말을 했다면 아마도 동우는 한동안 이런 자신의 얘기를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망설여지고 때론 두렵다. 그것은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예측하기 어려운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태도 때문이다. 친밀한 관계에서 그/녀가 어렵게 자신을 상대방에게 보였을 때 오히려 불편하고 서먹한 관계가 되거나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인해 상처를 받게 되면 한동안 또는 오랜 시간 그/녀는 자신을 숨긴다. 문제는 그/녀가 자신을 드러내기 전에는 상대방의 반응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드러내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상대방에 대한 신뢰도 필요하다. 그/녀의 드러내기는 더 친밀한 관계를 위해 시작되지만 그 결과는 타자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만약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면 그 수습은 다시 그/녀의 몫으로 돌아온다.

자신을 드러내기 또는 드러내지 않기

태수는 초등학교 때 같이 놀았던 친구에게 너무 화가 났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한 친구가 제가 복지관 그쪽에서 살았을 때, 뭘 받는 걸 알고… 눈치를 챘나 봐요. 그런 걸 봤나 봐요. (저한테) 받는 놈이 가난한 놈이….이렇게 화가 많이 나는 말을 하는 거예요. 아, 진짜 막 뭐라 표현해… 진짜 화가 났었어요.”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학교 선생님이 반 친구들이 다 있는 교실에서 공개적으로 부모 직업 조사를 했다고 한다. 사실 태수는 그의 아버지 직업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아버지에 대한 대부분의 그의 기억은 어머니와 자신을 빈번하게 때렸던 모습이다. 아버지가 술을 먹고 집에 들어온 날에는 그와 어머니는 잠을 잘 수도 없었고, 밤새 시달려야 했다. 그는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 들은 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동우는 인터뷰를 하면서 나에게 물었다. “왜 그런 걸 수업시간에 조사하는 거예요? 생활기록부인지 뭔지 거기에 다 있잖아요.”

인터뷰를 하는 동안 태수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청소년들이 이런 유사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수치심은 원치 않는 순간에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서 느끼는 감정의 표현이기도 하다. 누구든지 원치 않는 순간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노출을 강요당한다. 이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개인 정보가 공개되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통제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점점 더 느끼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 자신의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산다. 하지만 원하지 않는 개입에 의해 개인이 자신의 통제력 안에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을 제한받거나 상실하게 되면 자기 존중감도 훼손된다.

경희는 편하게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녀는 작은 소리에도 놀라고 혹시 늦게라도 아버지가 올까 싶어 불안하다. 부모는 이혼을 했지만 근처에 살고 있는 아버지는 수시로 어머니와 그녀가 있는 집을 찾아온다.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성적 학대는 이혼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녀는 그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고 지금도 듣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아버지는 그녀에게도 원하지 않는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 아버지는 뭔가 자신의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성적으로 수치심을 주는 언어폭력을 그녀에게 쏟아내곤 한다. 그녀는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욕구를 숨기고, 그녀 자신을 감춘다. 그녀가 자신을 드러낼수록 돌아오는 건 수치심이다.

개인의 드러내기와 감추기에는 차별적인 의미체계와 비대칭적인 권력관계가 작동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을 때 드러낼 수 없고, 보이고 싶지 않을 때 드러내기를 강요당한다. 빈곤과 성차별적인 구조가 일상적으로 작동하면서 이들에게 수치심이라는 사회적 고통을 준다. 누적된 수치심의 경험은 누군가를 침묵하게 만들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키기도 하고, 무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가 만난 청소년들은 아직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고, 끊임없이 관계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고, 꿈을 꾸고 있다. 진심으로 나는 이들이 계속해서 그럴 수 있기를 희망한다.

수치심과 자존감의 사회적 구성

수치심은 단지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현실이다. 이상하게도 이 사회는 수치스러운 짓을 한 사람들이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하다. 함부로 개인을 감시하고 사찰하고도 ‘우리만 그런 거 아니거든’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이들이 있다. 정리해고 이후 22명이나 되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죽었는데도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주민들이 공사 중지를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구럼비 파괴를 강행하면서 평화적 호소를 폭력적인 방식으로 억압하려는 이들도 있다. 정작 누가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가는 권력의 문제이고, 정치적인 것이다. 수치심을 둘러싼 권력과 의미체계를 재구성할 때 자기존중의 토대는 만들어질 수 있다.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다는 것은 단지 개인의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문제이다. 관계는 이미 사회적 위계, 비대칭적 권력관계, 차별적 언어들, 그리고 불평등한 자원 배분 등의 틀로 짜여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존중은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라는 문제와 닿아 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자신에 대한 존중을 지키기 어려운 사회인가는 자존감 척도를 통해 개인의 자존감 상태를 체크해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이러저러한 수치들이 말을 해 준다. 높은 자살률, 늘어가는 불안정한 일자리와 낮은 임금, 불평등지수 등등.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존중감을 지켜내기 어렵다.

자존감을 평가하는 척도, 그것을 통한 점수화, 그리고 낮거나 높은 자존감의 소유자라는 이름 붙이기는 결국 사회적으로 규정된 적응에 못 미치는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 방식이다. 만약 어려운 상황에서도 높은 자존감의 수치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쩌면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주문을 걸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잘 할 수 있다고, 나아질 거라고. 왜냐하면 그렇게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야 내일도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스스로에 대한 존중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우리 자신이 얼마나 스스로를 존중하고 있는지를 체크 받고 평가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 사회구조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존중할 수 없도록 만드는지를 평가하고 싶다. 지금 이 시기에는 이 사회가 자기 존중의 토대를 훼손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평가하고 바꾸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글쓴이: 호연(인권교육센터 ‘들’ 활동회원)
*출    처: 인권오름 제 2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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