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투, 여덟살 구역] 최강의 그룹이 나타났다!

어느 일요일 아침, 미용실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머리를 자르고 있는데 ‘띠링’ 하는 문자 알림음이 들려온다. ‘지환엄마’ 로부터 온 문자다. 지환이는 책언니를 하면서 만난 아홉 살짜리 남자애다. 아침 댓바람부터 지환이 어머님의 문자를 받다니, 깜짝 놀라 문자 알림창을 터치하자 사뭇 당황스런 광경이 펼쳐진다.

지환엄마: 모함.
나: (속으로) ???!!!!

한 3초 정도 혼란에 빠졌다가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7월 후반~ 8월은 여름 방학 기간이다. 방학 중에는 책언니 수업을 가지 않는다. 애들도, 우리들도 어느 정도 푹 쉬는 시간이 필요해서다. 여름 방학을 앞두고 지환이네 그룹과 마지막 수업을 하던 날, 지환이가 자기 엄마한테 전화를 해야겠다며 내 핸드폰을 가져가던 과거의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그 때 남긴 통화기록으로 내 번호를 엄마 폰에 저장해둔 모양이다. 짜식, 이러려고 그 때 그렇게 어색하게 내 폰을 가져갔구나? ㅋㅋ

(이상은 실제 문자 내용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나: 난 지금 미용실에서 머리 자르고 있엉.
지환 엄마: 바보
지환 엄마: 멍청이
나: 아닌데 천잰데
지환 엄마: 나대. 메롱.
나: 멜론 (요래 보내놓고 스스로의 센스에 감탄하고 있는 찰나 답장 도착)
지환 엄마: ♬ (음성 파일)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음성 파일을 열어보니, 어디서 녹음한 건지 개 짖는 소리가 현장음으로 왈왈 들려온다. 헐. 멜론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아홉 살의 미친 센스.jpg. 이대로 캡처해서 ‘우리 지환이가 이 정도에요’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너 대박 웃겨’ 문자로 엄지를 지켜들자, 지환이의 깔끔한 답장이 도착한다.

지환 엄마: ㅗ

책언니를 하다 보면 가끔씩 이렇게 폰으로 살짝 맛이 간 것 같은 대화를 하게 되는 때가 있다. 처음엔 애들이 내킬 때 마다 보내는 이 단답식 맥락 없는 메시지들(뜬금없이 자기 강아지 사진을 보낸다던지….)이 적응이 안 돼서 대응(?)을 잘 못 했었는데, 이게 다 놀자고 보내는 신호임을 체득한 이후로는 나름 여유를 갖고 없던 드립력을 나날이 개발 하고 있다.

최강의 그룹이 나타났다!

앞선 문자에서 보시다시피 다소 까칠한 지환이는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방실 방실 해사한 얼굴로 시종일관 웃기만 하던 아이였다. 처음엔 그 모습에 속아 지환이를 순한 양으로 착각했었다. 그도 그럴 게 지환이는 첫 날 수업에서 끝까지 책언니들의 옆을 지켜준 유일한 아이였다. 어떨 땐 산만한 한 살 아래 동생들을 이끌어 수업 진행을 나름 도와주기도 했었다. 이 의젓한 모습이 학교 물을 1년이라도 더 먹은 아홉 살의 눈치 빠른 처세였다는 것을 처음엔 미처 알지 못 했다. 물론 지환이의 내숭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올해 봄 한 지역아동센터에서 새로운 책언니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자애 한 명, 남자애 셋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그룹은 남자애들이 과반수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를 살짝 긴장하게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첫날부터 책언니들은 신세계(?)를 맛보게 되었다. 첫날은 보통 ‘궁금놀이 토끼굴’(두 책언니가 각각 궁금토끼와 놀이토끼가 되어 각종 놀이와 질문을 전전하며 애들과의 친목을 도모하는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 게임을 진행한다. 음, 솔직히 그동안 다른 수업은 몰라도 오티만큼은 자신 있었다. 일 년 넘게 책언니를 해보면서 백이면 백 이게 안 먹히는 곳은 없었으니까! 궁금놀이 토끼굴의 불패신화(?)를 깨부순 게 이 친구들이었다. 단언컨대 오티 시작한 지 삼십분 만에 방문을 열어젖히고 쿨하게 나가버린 건 얘네들이 처음이었다. 다른 애들은 만난 지 몇 달은 지나야 슬슬 꺼내드는 책언니 무시 스킬(?)을 이 친구들은 처음부터 구사했다. 책언니가 만약 여덟 살(아홉 살) 하트 공략 시뮬레이션 게임 같은 거였다면, 이 친구들의 난이도는 가히 최상급이었다.

일단 이 친구들의 캐릭터를 한 명씩 살펴보자면, 강준이는 건드리면 물어뜯는 다혈질 다람쥐 같았다. 애가 또래 애들보다 몸집이 작은 편인데, 그 조그만 몸으로 항상 쪼르르 쪼르르 부산하게 뛰어 다닌다. 겉보기엔 귀여운 다람쥐가 맞는데, 성격이 육식성이라고 해야 하나. 벌컥벌컥 화를 잘 내고, 승부욕도 엄청 강했다. 홍일점인 예진이는 처음엔 너무 단순해서 여덟 살 나이보다 더 어려 보였다.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든 룰을 잘 이해하지 못 했고, 수업시간 내내 자꾸만 밖에 나가 줄넘기를 하자고 졸라댔는데, 대화를 하다보면 어쩐지 막혀있는 무형의 막 너머에 말을 걸고 있는 듯 한 이상한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장우는 넷 중에 가장 말수도 적고 순한 친구였지만 수업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친구들이 밖으로 우르르 나가버릴 때도 혼자 방에 남아서 블록을 쌓았다. 맏형 지환이는 눈치가 빨랐다. 수업한 지 2, 3주 만에 책언니의 호구적 경향(책언니는 어른이지만 졸라 만만하다?)을 눈치 채고는 첫 날부터 날뛰었던 강준이와 함께 슬슬 난장판을 치기 시작했다. 가끔씩 순하게 웃는 얼굴로 ‘너 싫어’ 같이 비수 같은 독설을 날려대는 통에 어떨 땐 지환이한테 말 걸기가 살짝 무서울 때도 있었다.

그림책을 읽는 단 5분의 시간조차 쉽지 않았다. 장우는 수업 시작하자마자 블록을 쌓고, 예진이는 줄넘기 어디 있냐고 물어대고, 강준이와 지환이는 좌식 책상과 소파를 넘나들며 뛰어 다녔다. 답답하다고 날뛰는 이 친구들을 두고 우리가 대체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주의를 끌어올 수 있는 건지…. 드래곤빌리지 카드와 장난감 블록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진 난장판 속에서 말문이 턱턱 막혔다. 가끔은 센터에서 수업공간으로 내주신 이 널따란 방 안에 다 같이 갇혀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시작한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밖에 나가자고 하는 애들을 붙잡아 앉힐 때마다 앞으로 이 방 안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지 막막했다. 어떻게든 수업 시작은 해보려고 큰 소리로 그림책을 읽어봤자 돌아보는 이 한 명 없었고, 다른 데서는 애들이 제법 좋아했던 게임이나 얘깃거리들이 여기서는 씨알도 안 먹혔다. 분위기가 너무 산만하다보니, 애초에 수업 시작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책언니가 아무리 자유로운 분위기를 지향한다고 해도, 애들과 상호간에 ‘이 두 시간은 그냥 놀이시간이 아니라, 책언니들이 준비해온 것들을 함께 하는 시간’ 이라는 인식은 전제로 하고 진행이 되었던 편인데, 여기서는 그 틀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수업이라는 명목으로 모였으나, 애들의 무관심에 떠밀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우왕좌왕하는 혼란스러운 2시간이었다. 일종의 주도권 싸움에서 초장부터 졌다고 해야 하나. KO. 우리는 결국 수업을 포기했다.

수업이 중요한 게 아니야

처음엔 어리바리 상황파악이 안 됐다. 이 어수선한 분위기가 뭘 뜻하는지 몰랐다. 한 달쯤 지나서였을까. 여기서는 그동안 하던 대로의 방식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차차 받아들이게 됐다. 시작되지 않은 건 수업보다도, 애들과 우리 사이의 관계였다. 애들과 우리 사이에는 커다란 선이 그어져있었고, 책언니들은 자신 없어 하면서도 끝끝내 자기 위치(선)를(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관중 없는 무대 위에서 독백을 하는 배우들처럼 두 손에 대본(수업진행안)을 든 채, 이 멘트들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발이 묶여 있었다. 이대로는 처음 만난 낯선 타인에서 한 발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선을 넘어야 했다.

당장 안 되는 수업을 억지로 진행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들이랑 친해지는 게 먼저였다. 애들이 우리한테 맘을 안 여는 게 너무 느껴졌다. 다른 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달리 여기 애들은 우리를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센터 선생님들에게 하듯 우리가 하자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지는 않았지만(아무리 학생이라도 만만한 선생이라면 무시할 수도 있는 법이니까), 책언니들 역시 그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임을 알고 있다는 듯 어른으로 대했다. 우리가 ‘너희들을 위하네, 어쩌네’ 떠드는 말들에는 귀를 막은 채로, 그딴 거 다 필요 없으니 밖에 나가서 놀게 해달라고 허락을 요구했다. 책언니들이 아동에 대해 어떤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든, 애들이 책언니들을 무시하고 자기들 맘대로 놀든 어쩌든, 우리는 책언니 수업을 비롯한 모든 교육의 출발점을 기억해야 했다. 책언니를 하고 싶어서 스스로 신청하는 여덟 살 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 책언니를 요청하는 건 언제나 부모나 센터 선생님들 같은 주변의 어른들이었고, 정작 교육을 받는 당사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강제된 공간 안에 놓여야했다는 것, 이게 우리의 출발점이다. 결국 이 친구들한테는 책언니들을 만나는 공간 역시 또 다른 교실이었다. 네 명의 아이들은 한 달간 책언니라는 원치 않은 교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당한 시위를 벌였고, 제발 그만 좀 배우고 밖에 나가서 놀고 싶다는 어린 사람들의 바램은, 퍽 절실하고도 당연한 요구 사항이었다. 물론 이 모든 건 다 나중에 생각하게 된 것들이고 당시에는 애들을 더 버텨낼 재간이 없다. 에라, 모르겠다. 딱 그 심정으로 예진이가 그렇게 졸라대던 줄넘기를 집어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선 넘고 벚꽃 잡기

한참 벚꽃이 흩날리던 봄날에 이 친구들을 만났다. 수업하는 공간 바깥에 커다란 벚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 나무의 꽃잎이 다 흩날려 가지가 듬성듬성해질 때까지 나무 앞에서 줄넘기도 하고, 돌 던지기도 하면서 애들이랑 마냥 놀았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꽃잎 잡기다. 바람 불 때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꽃비를 맞으면서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꽃잎들을 허공에 두 손을 휘휘 저어 잡았다. 꽃잎을 잡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애들이 그러고 놀기에…. 그냥 따라 했다. 정작 꽃잎을 갖고 싶어 애가 타는 강준이는 아무리 동동 걸음을 쳐도 손이 너무 작아서 잘 잡지도 못 했다. 나도 손이 큰 편은 아닌데, 그래도 나름 다 자란 어른 손이라고 몇 송이 잡히는 것들이 있었다. 강준이가 번번이 꽃잎을 놓치고 약이 올라 하기에 먼저 잡은 꽃잎들을 몇 개 줬다. 싫다 안 하고 냉큼 받아 주머니에 챙긴다. 그 날, 여기로 수업을 오고 나서 처음으로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애들도 한 결 편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어수선한 봄을 떠나보내고, 우리는 뜨거운 여름을 맞이했다.

<패러디가 난무하는 다음편 예고>

‘웰컴투, 여덟살 구역’의 계절은 거꾸로 간다.
가을의 중심에서 여름을 외치다!
지환, 예진, 장우, 강준 4인방과 보낸 hot 뜨거 뜨거 뜨거운 여름 이야기~
우리 이제 제법 친해졌어요?!

 

*글쓴이: 엠건 ( ‘교육공동체 나다’ 활동가 )
*출    처: 인권오름 제 406 호 2014년 09월 04일 15:4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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