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날다] 인권교육이라 이름 붙이기에는 쑥스러운
서로의 상처에 관심갖기를 위한 교실 안 붕대클럽 활동

원래 인권교육으로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음, 나는 방학 끝나자마자 축제 준비를 해야 했고, 8월말과 9월초라는 애매한 시간을 왠지 진도로 메우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다만 뭔가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인권교육 프로그램은 고2 2학기의 아이들에게 너무 닭살스럽거나 뻔하거나 할 것 같았다. 아니면, 잘 알아듣는 아이들에게는 삶에 필요한 교양 같다는 느낌???그래서, 나는 아이들과 꼭 함께 보고 싶었던 영화 한편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고른 영화가 붕대클럽이다. 붕대클럽은 사실 겉으로 보기에 특별한 영화는 아니다. 포스터를 보면 ‘워터 보이즈’, ‘스윙 걸즈’ 등의 청춘물의 외양을 하고 있다.

영화 붕대클럽 포스터

영화 붕대클럽 포스터

주인공 ‘와라’는 집안이 넉넉하지 않은, 여느 청춘물의 주인공들처럼 적당히 활발하고 적당히 새침한 고등학생이고, 그의 친구 시호는 연애에 목매지만 그만큼 실패하는 전형적인 발랄한 주인공의 친구이다. ‘와라’는 우연히 ‘디노’를 만나 자신이 상처를 입은 장소에 붕대를 감아주는 체험을 하게 되고,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와라와 시호가 다른 친구들과 함께 붕대클럽을 만들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의 상처가 있었던 곳에 붕대를 감아주는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가운데 주인공들의 상처가 드러나게 되고, 드러난 스스로의 상처들을 치유해가는 이야기이다. 이렇듯 이 영화는 전형적인 성장영화이자 청춘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영화를 다른 영화들보다 더 사랑하게 된 이유는 다른 성장 영화가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성장의 무게를 두고 있는 반면, 이 영화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영화도 자기 상처에 깊이 침윤되어있는 주인공이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면서 서로 보듬어나가는 전형적인 성장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그 상처 치유의 방식이 자신 스스로만의 노력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의 상처를 돌보는 과정’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현대 사회에서 심리적인 외상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것으로 치부하고 내면의 메커니즘 안에서만 접근하는데 반해, 이 영화는 나의 외부적인 실천을 통해 나의 상처와 타인의 상처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는 길임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의 상처는 사실 그 원인이 복잡한 사회 시스템 속에 감춰져 있어서 그 상처의 발원지를 알지 못한 채 상처를 치유해야하는 모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주인공 ‘와라’는 마트에서 성실한 마음으로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그 자신의 성실함 때문에 옆 코너의 나이든 아주머니가 젊은 사람으로 교체되고 해고되었음을 알게 된다. 와라는 이렇게 말한다.

내안에 여러 중요한 것들이 사라져간다. 언젠가부터 그것을 깨닫고 있었다. 예를 들어, 악마 같은 녀석이 다가와서 ‘이것과 이것을 가져 간다’고 알기 쉽게 선언해준다면 제대로 눈치 채고 저항하겠지만 현실에서는 ‘눈치 챘을 때는 이미 사라져있어’ 그것도 적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매일같이 조금씩 사라져간다.

한 때는 같이 어울려 놀던 방언클럽이었지만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다른 길을 가게 되면서 헤어졌던 리스키와 템포는 3년 만에 다시 만나서 템포의 주상복합아파트가 사실 리스키 아버지의 도산한 공장터에 지어졌음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템포가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매우 현실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던 우등생이었던 템포였지만 붕대클럽이 너무 행복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붕대클럽을 학교와 경찰에 신고하고 자신은 자살을 결심하게 된다. 이를 알게 된 붕대클럽은 템포를 위한 붕대를 감고 이들은 다시 화해하면서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게 된다.

함께 놀던 세 명의 단짝 친구 중에서 자신이 우연히 가지 않았을 때 한 친구가 다른 한 친구를 살해하려고 했던 이유가 ‘그가 나보다 행복해보여서’라는 것을 알게 된 디노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얼마나 큰 결과를 낳는 가를 깨닫고 전쟁 속에서 고통 받는 아이들과 비슷한 경험을 하기 위해 텐트에서 폭죽을 터뜨린다든지 맨발로 걸어 다닌다든지 하는 기행을 한다.

즉, 다른 사람의 상처에 관심을 가질 때만이 나의 상처를 들여다 볼 수 있고, 조금씩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흥적인 붕대클럽 활동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사실 인권교육에 필요한 것은 이러한 감수성이 아닐까싶었다. 나와 ‘관계없다고 보이는 다른 사람의 상처에 대해 관심 갖기’,그리고 그 관심을 통해서 ‘나의 상처와 그들의 상처가 같은 맥락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나는 즉흥적으로 아이들에게 붕대클럽 활동을 제안했다. 즉 아이들에게 자신이 상처받은 장소와 사연을 무기명으로 써서 내고 , 아이들끼리 붕대클럽을 만들어서 그 중 한 사연을 골라 붕대를 감고 사진을 찍는 것이 그것이다.

자신이 상처받은 장소와 사연을 써내라고 하여 받았을 때, 가슴이 아팠던 것은 ‘학교’에서 주는 상처가 유독 많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상처란, 결국 내 마음속 깊은 속의 내면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제도와 사회와 부딪히는 과정에서 받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것이다.

아이들은 여러 곳에 돌아다니면서 붕대를 감았고, 나름의 사연을 남겼다.

아이들이 적은 상처의 기억들

아이들이 적은 상처의 기억들

 

아래는 교실에서 꿈을 잃어버렸다며 교실에 붕대를 감아달라는 사연에 대해 아이들이 사진을 찍은 것이다.

직접 만들어본 붕대클럽

직접 만들어본 붕대클럽

 
어떤 아이들은 붕대클럽의 아이들이 처음에 보였던 반응처럼 “ 남의 상처가지고 장난치는 거 같다” 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진지하게 참여했던 아이들은 “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보다 나은 것 같다” 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내가 스무 살이 되어 세상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게 되면서부터 가졌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뭔가 부당한 건 알겠는데 내가 그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 진정으로 도움이 될까? 내가 너보다 여유로워서 관심 갖는 다는 돌려서 하는 자랑은 아닐까?” 그런 나의 마음 속 장벽에 작은 구멍을 내어 바람이 솔솔 통하도록 해준 것이 인권 교육이 아니었나 싶다. 인권의 보편성 속에서 나와 별 상관없는 사람들의 상처와 나의 상처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아무도, 언제인지도 모르게 빼앗기는 것들을 빼앗아가는 것들의 실체를 알게 되는 것, 그리고 그들 또는 그것들에게 우리가 함께 붕대감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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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직접 해본 붕대클럽

아이들이 직접 해본 붕대클럽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 인권교육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 네 말이 맞을 지도 모르지만, 아무 것도 안하는 것보단 낫잖아. 붕대하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정말로 멋진 일이잖아”

인권이 우리에게 붕대가 될 수 있을까? 그 붕대는 우리의 무기가 될 수 있을까?
이 활동을 하고 나서 한 친구가 올린 소감문으로 이 글을 마감하려고 한다.

 

붕대클럽 활동 후 소감

작문 시간을 이용해서 붕대클럽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여주인공인 와라는 옥상 난간에 올라섰다가 자신을 디노라고 주장하는 아이에게 자살을 하려한다는 오해를 받고 디노는 그녀의 상처를 치유해주겠다며 난간에 붕대를 감는다. 그 일을 비웃은 와라는 막상 자신의 친구 시오의 일을 겪자 디노의 방법을 이용해 시오를 위로하고 시오는 이것을 자신의 인터넷 지인들에게 알린다. 그리고 이 일에 관심을 갖게 된 기모가 사이트 개설을 제의하고 이 아이디어의 원작자인 디노 또한 참여한다. 이들은 붕대클럽을 진행하며 자신들의 상처들 또한 점차 치유해간다.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던 사람은 템포다. 겉으로는 강해보이고 자신만의 신념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내가 보기에 제일 자신의 신념이 없고 세상의 세태를 따라 사는 수동적인 인간이었다. 그녀는 리스키 처럼 자신의 장래를 자신의 힘으로 책임지고 이끌어나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시오처럼 나름의 감정을 존중해가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와라처럼 주변 사람을 배려하는 힘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안정감을 느끼지 않았고 디노 처럼 소극적이나마 자신의 아픔에 대응하지 못했다. 그녀는 단지 세상이 그녀에게 요구한다고도 할 수 있는 것들을 차근차근 해나가는 것뿐 그녀만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와라와 시오에게 조차도 자신의 신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들이 말하는 것들로 그녀들을 ‘비난’함으로써 상처를 입힌다. 누군가는 그녀를 현실적이고 냉철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는 자신의 상처도 끌어안지도 버리지도 덮어버리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세상에 따라가기보다는 내 길대로 내 느낌대로 살기를 원하는 내 신념에 비쳐 그녀에게 화난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것보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 비치는 것만 같아 더 열이 받았던 것 같다. 내 뜻대로 살기에 이 세상은 너무 틀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템포는 와라의 고등학교 졸업 후의 취직에 대해 비난에 가까운 말을 한다. 대학에 가지 않으면 패배자라니…대학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대학에 가고 싶지 않으나 가는 사람도 있다. 더 슬픈 경우는 대학에 가고 싶은지도 가고 싶지 않은지도 모르고 그저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막연히 대학에 가야만 하야한다…라고 생각하는 부류인 것 같다. 각자가 원하는 길은 다르고 각자가 가야할 길을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대학이라는 다리를 통해 가야만 하는 길을 걷길 원하는 수가 있고 누군가는 대학이라는 길이 없이도 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대학이라는 다리가 아예 없어서 이용할 엄두를 못내는 사람도, 그 대학이라는 다리는 필요가 없다며 무너뜨려 버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난 할 수만 있다면 대학이라는 다리를 건너지 않더라도 자신의 길로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템포는 붕대를 감아주는 것조차도 상처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난 그 이야기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 상처받은 사람의 상처를 위로할 때 그 사람의 상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공감’이 없는 ‘위로’는 ‘위로’가 아닌 ‘동정’과 ‘상처’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공감’이 없는 ‘이해’는 없고 ‘이해’가 없이는 ‘위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개인적인 가정상황으로 그런 사람을 많이 겪어왔고 그들은 어줍지 않은 위로로 날 괴롭게 만들기 일수였다. 그 때마다 난 그들이 나에 대해서, 내 상황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서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자기만족’이며 ‘자기기만’이라고 까지 생각했다. 아니, 아직까지도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나와 그 사람들을 바라보자, 어쩌면 그들은 단지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 그 자체에 공감하고 위로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단지 그 힘들어하는 모습에 공감하고 내 상처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단지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였을까. 그러자 그들의 모습이 단순히 그저 그냥 나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으로 보였고 감정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디노의 말처럼 모든 사람이 서로의 고통에 공감한다면, 서로가 고통 받을 것을 알기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또한 그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공감’이 아니라 ‘경험’이 아닌 이상 완벽하게 공감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러나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아파하는 사람을 보면 위로해주길 원하고 또한 그 사람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원한다. 그런 점에서 디노처럼 우리도 비록 극히 적은 수의 확률일지라도, 그게 설사 0.0001%에 불과할지라도 그 0.0001%의 희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내가 붕대클럽을 하게 되었다. 외모 때문에 놀림을 받았다는 사연이었다. 되도록이면 직접 그 장소에서 하고 싶었고 진지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조장님인 한지영 양은 역시 너무 솔직했다. 지영이는 학원 관계자에게 사실대로 말했고, 그 사람은 ‘물론’ 거절했다. 세상이란 이런 것 같다. 그저 진실만으로는 세상은 우리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 사실에 다시 한번 속상했다. (사실은 짜증나서 아줌마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으나 그 사람도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아니 참았다) 하는 수 없이 건물 아래로 내려가 문손잡이에 붕대를 감아야했고 사연 제보자의 뜻대로 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심히 속상했다

다른 조 사진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내 사연이 채택(?)되어 올라있었다. 음…기분이 좋아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웃음이 나오면서 즐거워졌다. 물론 지금은 그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되어서 일수도 있겠지만 비록 상처를 치유한다는 차원은 아니지만 사람을 웃게 할 수 있는 것, 그게 우리가 붕대를 감은 이유가 아닐까?

 

  • 우돌(우돌 님은 인권교육센타 ‘들’의 활동가이자 현직 고등학교 교사입니다)
    – <인권오름> 제 174 호 [기사입력] 2009년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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