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들의 ‘학생 혐오’에 대하여
-교육청 교사 직무연수 인권감수성 교육 후기

‘과방’에 생리대를 비치한다는 학생회의 방침에 “그럼 면도기도 놔달라”고 핏대를 올리던(혹은 빈정대던) 복학생 선배들이 떠오른다. 여성들에 의한 남성 역차별이라고 부르짖던 이들.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학내 ‘반성폭력 담론’에 이들은 “이럼 또 성폭력이라고 하겠지?”라고 치고 빠지거나 “콜센터 전화는 여성 목소리가 나오는 게 더 부드럽고 좋은 거 아냐?”라며 ‘자연스러운 차이’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다.” 이 문장이 내게 준 울림이 있었다. 그동안 나의 무지로 인해 가해자의 위치에 있고서도 그런 줄 몰랐던 나 자신을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럽게 만든 이 ‘앎’을 여성주의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채식을 하고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면서 그 전까지 모르던 새로운 세상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육식과 석유, 자동차 문화 속에서 내가 누리던 삶의 윤택함은 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 번도 소수자로 살아본 적 없이, 누군가의 눈치를 볼 일 없이 편하게 살면서 오히려 주변인으로 하여금 내 눈치를 보게 만드는 훌륭한(!) 특기를 가졌다는 자괴감 속에 병역거부는 어찌 보면 너무 자연스런 선택이기도 했다. 더이상 ‘가해자’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 혹은 그렇게 폭력의 문화를 유지하는데 더 이상 협조할 수 없겠단 신념(고집?)이 있었기에 감옥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 건지도 모르겠다.
지난 봄, 독일과 핀란드에서 병역거부 강연을 하며 교생 나갔던 장면을 보여주고 나면 청중으로부터 꼭 나오는 질문이 “지금은 교사를 할 수 없느냐”였다. 대체복무가 존재했거나(독일, 지금은 징병제 폐지됨) 대체복무까지 거부하더라도 감옥은 가되 전과기록은 남지 않는 곳(핀란드)에 사는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는 군대 안 간 죄로 교사의 꿈을 이룰 수 없게 된 한 청년의 안타까운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다. 다른 언어의 한계 속에 내가 말하고자 했던 질문의 답은 이렇다. 처음엔 ‘문제 교사’가 되지 말아야지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 어느새 학교란 공간 속에 교사의 위치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겠단 생각으로 바뀌는 과정 자체가 병역거부에 대한 고민 속에 일상의 권력관계와 나의 위치성을 따져보는 맥락과 떨어질 수 없었고, 이는 교사로서 내가 아무리 ‘착하게’ 행동하더라도 학생들에겐 언제든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간수’의 위치로 인식될 수 있는 구조에 연루되지 않겠다는 선택이었다고.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대로 손에 “똥 안 묻히고” 살 수 있는 것도 주변의 덕일 터이니 흔치 않은 복이란 것도 알고 있다.

‘학생혐오’인가 ‘경멸’인가 – “10만원짜리 가방을 선물하는 미성숙한 아이들”

이번에 서울시교육청 직무연수 일환으로 진행된 ‘인권감수성 향상’ 과정에 온 교사들을 보면서 저 위에 쓴 복학생들 생각이 많이 났다. ‘교권이 무너지고 있는데 무슨 학생인권이냐’는 식으로 말하는 교사들을 한 두번 본게 아니라서, ‘장애인권 때문에 종사자 인권이 침해받고 있다’고 항변하는 이들도 보아왔기에 그렇게 반감을 가진 참여자들을 만나기 전에는 한번 더 머리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하고 세심한 준비를 하게 된다. 그럼에도 한번 그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시작하자(‘우쭈쭈’?) 끝도 없이 “민원을 제기하는” 교사들과 3시간을 보내고 난 뒤에는 그들이 했던 모든 말들이 자신들의 반인권적 생각을 ‘인권강사’로부터 승인받고자 하는 치사한 의도였다는 생각에 며칠간 분노가 사라지질 않았다. 물론 그 분노의 반대편에는 그래도 뭔가 현장에서 인권적으로 시도해보고 싶어서 앉아있는 참여자들의 표정이 눈에 밟히는, 아쉬움과 미안함 역시 많이 남는 교육이었다.
“아직 뇌가/도덕성이 발달하지 않아서”라는 식의 발언(‘발달심리 드립’)이나 “인권교육 받아서 애들이 자기 권리만 알고 남 배려할 줄 모른다”는 발언(‘싸가지 드립’), “그래도 애들은 엄하게 혼내야 말을 알아듣는다”는 발언(‘짐승/노예 드립’)들이 더 이상 놀랍지 않다. 그들의 드립을 유형화하여 사전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학생인권이든 청소년인권이든 세상을 바꿔나가려면 그런 교사들과 부딪혀야 하는거겠지 하는 생각과 동시에 한편으론 그런 꼴보기 싫은 사람 안 만나고 “공략하기보단 낙후”시키는 방식으로 운동을 하는 건 불가능한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계몽의 관점에서 성숙한 자와 미성숙한 자의 구분을 전제하는 것이 기존 교육의 문제라고 한다면, 그렇게 반인권적인 교사들을 어쨌든 결국 우리 편이 되도록 ‘계몽’하는 것도 인권교육의 목표인걸까 자문도 해보았다.
“아이들은 미성숙하기에 충동적이고 다른 이의 의견에 휩쓸리기 쉽다”는 질문에 그렇게 진심으로 ‘미성숙함’을 주장하는 집단도 교사들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보통 다른 참여자 집단의 경우 예컨대 ‘보호주의’를 넘어서기 힘들어하는 엄마 정체성이 있는 이더라도 “애들이 나보다 나을 때가 있는 것 같아요”라는 답이 나오는데, 이번에 만난 한 교사는 “초등학교 3학년 짜리가 돈이 어디있어서 친구 되고싶다고 10만원 짜리 선물을 주더라고요”라면서 아이들의 미숙함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미성숙” 논리야말로 이 사회가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방식이라는 강사의 지적에 수긍한 듯 하다가도 ‘학생’ 얘기만 나오면 “아직 미숙한 애들”이란 전혀 다른 논리 회로가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교사들과 만나야 하는 학생들이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때려서라도 가르칠 건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는 문장에 한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젠 더 이상 때리고 싶은 마음도 없다고. 학생들한테 너무 당해서 교사 해먹고 싶지가 않다고. “말 안 들어 내가 죽도록 팼던 제자가 몇 년 뒤에 징역 살고 나왔다면서 자기 때려줘서 너무 고맙다고 말하더라”고 했던 예전 교육 때의 교사는 차라리 논쟁이라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젠 때릴 마음도 없다”고 무기력을 호소하는 교사 앞에선 어떻게 대화를 풀어야할지 그 짧은 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간다. “문제 학생”과 “교권을 역차별하는 교육 당국”의 문제로만 생각하는 그 교사의 프레임을 다룰 수 있으려면 그이의 마음을 일단은 공감해주어야 할텐데, 한번 공감을 시작하자 돌아온 건 걷잡을 수 없이 말문이 트인 주변 교사들의 울분이었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인권교육이 아니라 상담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진심으로 들 정도로 억울함 섞인 호소는 끝이 없었고, 나의 어떠한 말도 “현장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고 있구나 싶었다.

“인간이 불안, 공포, 좌절감, 절망의 정서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택하는 자기 보존의 노력은 코나투스의 전도 즉, 종족, 종교, 민족, 국민 등 상상적 동일성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이 동일성에 대한 고착을 방해하거나 저해하는 것에 대해서 증오의 정서를 갖게 된다.”(정정훈, “혐오발화는 무엇의 지표인가?”)
“(혐오를 통해 우리는) 실제로 견뎌내기 어려운 삶의 문제를 보다 잘 회피할 수 있게 된다. 혐오는 자신의 몸이 퇴화하고 있으며 유한하다는 것을 자각할 때 생기는 불안감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기도 하다.”(마사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교사에 대한 이미지가 그림자도 밟으면 안 되는 스승이 아닌 고객의 수요에 봉사해야 하는 존재로 전환되는 과정은 교육에 시장의 논리가 도입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시장 논리가 역설적으로 기존의 권위적인 교사-학생 관계를 민주화하는데 일면 일조한 측면도 있는 것이다. “교권 붕괴” 담론이 한국 사회에 등장한 것은 ‘민주화’ 이후 자본의 질서가 사회의 지배적인 규범으로 자리 잡는 것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학생인권’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인 1990년대부터 “신세대”니 하는 말 속에 “이제 학생들을 어떻게 통제하느냐”고 어려움을 토로하는 교사들의 발화는 존재해왔다.
학생인권 담론의 등장과 함께 더 이상 맘에 안 드는 애들 옛날처럼 대놓고 쥐어 팰 수 없게 된 조건(‘민주화’) 그리고 성과급 도입처럼 노동 유연성이 고스란히 침투하고 있는 교사들의 노동 조건(‘시장화’) 속에 교사들이 공포를 느끼게 되는 맥락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공포를 해결하기 위해 교사들이 택하는 ‘반인권적’ 인식을 문제 삼는 것이다.
“돈도 없는 애가 친구 사귀겠다고 10만원짜리 선물을 산다”는 인식은 “돈도 없는 처지에 그 돈 모아서 성형이나 하고 남자들한텐 얻어먹으려고만 한다”는 식으로 작동하는 이 사회의 여성혐오와 다를 바 없어보였다. 군 가산점제 폐지에 흥분한 예비역 남성들이 분노의 화살을 국가가 아닌 여성들에게 돌리는 것처럼, 유연화된 고용정책을 펼치는 자본을 비판하지 않고 “자기 밥그릇 빼앗아가는 이주민”을 증오하는 것처럼, 교사들은 자신의 자율성과 노동권을 부정하는 이들을 지목하지 않고 약한 고리인 학생들을 혐오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면서 늘 자신들이야말로 약자이고 피해자임을 주장한다. 참으로 치사하다. 전국학생인권실태조사를 보면 여전히 다수의 학생들이 학교에서 차별을 경험하고 학교에 있으면 숨이 막힌다고 말하는데, 교사들은 학생들 때문에 힘들어 못 해먹겠다고 한다. 교사들을 힘들게 하는 노동조건에 대한 성찰과 ‘학생인권 때문에 교권이 없다’고 주장하는 피해자 코스프레는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교사들의 ‘학생혐오’가 ‘혐오’인지 아니면 단순한 경멸인지 헷갈리는 측면은 있다. 혐오가 상대로부터 위협이나 두려움을 느끼는 것과 연결이 되어 있다면, 교사들은 ‘학생인권’ 담론에 자신들이 더 이상 학생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미숙한’ 존재라는 낙인으로 상대에 대한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기도 하다. 후자의 경우는 폭력을 ‘교육’이란 이름으로 우아하게 포장한다는 점에서 더 문제적이다. 이 사회의 여성혐오에 대해 정희진이 말한 바 있는 다음의 문장이 머리를 맴돈다. “전통적인 혐오(포비아)는 공포와 무지로 작동한다. 지금 일련의 사건들은 무지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그냥 약자를 함부로 하는 것이다.”(정희진)

인간의 변화가능성에 대한 신뢰?

교사들은 말한다. 학생들이 자유만 알고 책임질 줄은 모른다고. 풀어줬더니 더 기어오른다고. 군림하느냐 군림당하느냐 식의 관계 밖에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인권은 ‘상대를 밟아도 될 권리’로 인식되기 쉽다. 그런 모습을 예로 들며 교사들은 학생인권이 불편하다고,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한다. 하지만 학생들이 보이는 그런 ‘폭력적인’ 모습들이야말로 인권적 문화와 경험이 더욱더 필요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주인이 되어 직접 해보고 책임져보는 경험이 없었으니 ‘무책임’한 모습 밖에 보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우아하게 ‘책임’ 운운하는 교사들도 실은 책임지는 법을 제대로 배워보지 못한 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교사 개개인의 선의와 무관하게 그 권력관계 속에서 ‘갑’의 위치에 놓여있다는 위치성과 책임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 결국 인권감수성과도 연결된다는 얘기가 “왜 자꾸 교사들을 싸잡아 가해자 취급을 하세요”라고 밖에 들리지 않는걸까. 내 말하기 스킬의 부족인걸까, 아니면 교사들이 갖고 있는 억울함이 너무나 큰 것일까. “내가 저지른 것도 아닌데 왜 나를 가해자 취급하느냐”는 일본의 젊은 세대에 대해 다카하시 데쓰야는 “직접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그 전쟁의 결과 지금의 윤택한 생활을 즐기고 있는 자로서의 책임”(<국가와 희생>)을 지적한다. 학교에서 인권을 침해당한 피해자는 존재하는데 거기에 책임지는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는 비극에 교사들은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기차에서 옆좌석에 앉은 여성이 나의 신체를 경계하는 기색이 느껴질 때, 영화관에서 모르는 일행이 내 옆자리에는 여성 대신 남성이 앉는 선택을 보면서, “아니 나를 지금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라 보는거냐”는 항변이 말도 안 되는 것처럼 세계인권선언이 나온지 반세기가 지나서야 “학생도 인권이 있다”는 말이 등장한 것에 “아니 난 체벌한 적도 없고 인권적으로 얼마나 노력하는데 교사들을 싸잡아 가해자 취급하느냐”고 말하는 교사들을 괴물로 치부하기 전에 한 번 더 그들의 심리를 이해해보고 싶다. ‘비인간화’를 통해 살인을 가능케 하는 군대를 거부했던 마음을 다시금 떠올리며 교사를 ‘적’이 아닌 인간으로 보고 싶은, 스스로에 대한 도전 과제랄까.
교육이 끝난 뒤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 뒤에서 한 참여자가 나를 부른다. “오늘 너무 힘드셨죠?” 한 마디에 경계심이 풀린 나는 이 분이 어떤 얘기를 더 할지 궁금했다. “제가 사실 작년에 6학년 맡아서 인권적으로 정말 열심히 대해줬거든요. 근데 아이들 행동이 안 바뀌더라고요. 어디까지 풀어줘야 하나 계속 고민도 되고. 올해도 힘들어서 이 연수 들은 건데, 다음 전문과정 들으려고 했더니 선착순으로 한다네요. 그것도 인권적으로 문제 있는 것 아닌가요?” 당황한 나의 침묵을 파고 든 그녀는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근데 오늘 선생님이 든 사례들이 너무 일반적이지 않은 것 같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모든 교사가 그렇게 행동하는 건 아니거든요. 아무래도 현장에 안 계셔서 그런 게 아닐까. 아 근데 죄송해요. 제 버스가 와서 먼저 타볼게요.” 인간에 대한 신뢰를 놓고 싶진 않지만 앞으로 한동안 교사 교육은 하고 싶어지지가 않을 것 같다.

⁍ 정리 ‖ 날맹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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