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무중, 뒤죽박죽, 그렇지만 도란도란
출구(EXIT)를 찾는 거리 청소년들과 함께 한 스토리텔링

EXIT 버스가 뭐지?

‘들꽃’과의 첫 만남은 2008년 청소년노동 실태조사를 하면서였다. 쉼터에 거주하는 청소년들이 아무래도 아르바이트 경험이 많기 때문에 다리를 건너 건너 소개받은 도라라는 친구가 바로 (사)들꽃청소년세상에서 운영하는 쉼터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중학교 때 집을 나와 주유소, 당구장, 편의점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던 열아홉 살 도라는 지금껏 한 번도 최저임금이라는 걸 받아본 적이 없었던 친구였고, 노동재해, 욕설, 성희롱 등 청소년노동의 온갖 문제점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도라는 실태조사 발표 기자회견장에까지 나와 자기의 삶과 노동을 증언해 주었다.
들꽃과의 인연은 우리 활동회원인 나경이 들꽃 활동을 시작하면서 다시금 이어지는가 싶더니, 지난해 쉼터 생활 청소년들과 함께 한 인권수업, 그리고 올해 5차례에 걸쳐 ‘엑시트(EXIT) 버스’에서 진행된 스토리텔링 수업으로 더욱 깊어지게 됐다. 지난해 여름부터 들꽃은 ‘움직이는 청소년센터 EXIT’이라는 이름을 가진 버스를 타고 안산과 부천을 찾기 시작했다. 거리 청소년들에게 따뜻한 밥과 수다, 쉼이 가능한 공간을 만들어주자는 취지였다고 한다. 거리 청소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시간대에 필요한 공간을 열어야 한다는 들꽃 활동가들의 신념에 따라 버스는 매주 1번씩 저녁 8시부터 새벽 2~3시까지 개방된다. 주방, 밥상, 놀이터, 쉼터, 잠자리, 수다방까지 고루 제공될 수 있도록 버스 안도 알맞게 개조했다.
올해는 버스를 찾아오는 청소년들 가운데 자기 이야기를 좀더 깊이 나누고파 하는 이들을 모아 스토리텔링 모임을 갖기로 하고, 우리 ‘들’에 기획과 진행을 부탁해왔다. 그리하여 안산은 루트가, 부천은 내가 맡기로 하고, 올 봄부터 9월까지 5차례에 걸쳐 거리 청소년들과 함께한 스토리텔링 모임이 이어졌다. 버스 안은 비좁고 어수선해 가까운 주변에 안정적인 공간을 하나 빌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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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과 거리 청소년, 시작부터 깨져야 했다

하기로는 했지만, 막상 스토리텔링 수업이란 이름에 상당한 압박을 느끼게 됐다. 참여자들의 참여와 소통을 중요시하는 ‘인권교육’과 ‘스토리텔링’의 차이가 크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같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인권교육은 어떤 형태로든 참여 프로그램을 통해 나누었던 이야기를 갈무리하는 작업을 반드시 수행한다. 갈무리 시간을 통해 교육 진행자의 가치관과 교육의 주제 의식이 선명하게 부각되기 마련이다. 반면, 스토리텔링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배움이 일어나고 견해가 확장된다고 할지라도, 곧 교육적 작용이 일어날지라도, 진행자에게 내용을 종합할 ‘권한’이 주어져서는 안 되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동등한 자격으로 대화에 참여해야 하고 그래야만 대화가 지속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익숙했던 인권교육가로서의 위치를 내려놓고, 정말로 진행자로서의 역할만 맡겠다는 다짐을 하고 모임을 시작했다. 그러나 모임을 진행하면서 순간 순간 ‘그건 아니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좋아’라는 말을 하고 싶어하는 나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느라 애를 먹었다.
또 막상 청소년들을 만나보니 내가 그동안 예상해 왔던 ‘거리 청소년’이라는 개념이 무척이나 협소했다는 것을 곧장 깨달을 수 있었다. 버스를 찾아오는 청소년들을 보니 ‘거리 청소년’이란 단지 탈가정 청소년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일시적이든 장기적이든 집을 나와 현재 거리를 떠돌며 생활하는 이들도 있고, ‘가출 팸’이라 불리는 새로운 가족을 이루어 사는 이들도 있고,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기 싫은 이들도 있고, 탈가정 경험이 있든 없든 EXIT 버스가 좋아 찾아오는 이들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든 집이나 학교에서, 사회에서 출구(EXIT)를 찾고 싶어하고 그래서 떠돎의 정체성을 지닌 모든 청소년들이 ‘거리 청소년’이라는 단어 아래 모두 포함된다고 봐야 함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나눴나?

한 달에 한 번, 모두 다섯 번에 걸쳐 진행된 스토리텔링 모임은 여러 가지 변천을 겪어야 했다. 첫 시간에는 일곱 명이 모여 서로 소개도 하고, 자기에게 EXIT 버스가 어떤 의미인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이들에게 버스는 밥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하고, 일주일에 가장 기대되는 순간이기도 하고, 삶 그 자체이기도 했다. 버스에 대한 애착과 신뢰를 드러내는 이들을 보면서 그동안 들꽃 활동가들의 수고로움이 절로 느껴졌다. 앞으로 모임에서 나누고픈 주제를 함께 정했다. 거리의 생존법칙, 무한도전(꼭 해보고 싶은 일), 억울해, 죽도록 미운 인간, 세상의 새빨간 거짓말, 사랑과 연애의 달인 되기, 맞을 짓, 매력적인 인생 등 미리 뽑아간 주제들에 대해 친구들은 고루 호감을 보였다. 서로 말을 놓으면서 동등한 호칭으로 시작하고 싶었지만, 이미 형성된 관계들 속에 문득 들어간 내가

두 번째 시간에 찾아가 보니, 첫 시간에 왔던 일곱 명 가운데 다섯이나 사라진 상태였다. 한달 사이 이런 저런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버스에 오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첫 시간에 왔던 여성청소년 두 명과 새로운 인물 다섯 명이 모여 거리의 생존 법칙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다.” “거리에서 살아남으려면 절대 믿으면 안 된다.” “남자들에게는 절대 마음을 털어놓으면 안 된다.” 당장 잠잘 곳이 없어 헤매다녔던 기억,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돈을 빼앗겼던 기억, 남자 친구에게 자기 힘들었던 기억을 말했다가 소문이 퍼져 혼비백산했던 기억, 돈을 훔치지 않고는 당장 굶을 수밖에 없었던 기억, 조폭들에게 쫓겼던 기억 등 거리 생활의 고초들을 하나둘 털어놓기 시작했다. 비열한 거리가 아니라 만화 <원피스>에 나오는 항해처럼 우애의 거리는 어떻게 가능할까로 나아가고 싶었지만,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기는 바람에 그 이야기까진 가지 못했다.
세 명의 남자 친구들이 가야 한다며 중간에 일어서고 나자, 오늘 처음 온 여자 친구 하나가 남자친구에게 당했던 성폭력 경험을 털어놓았다. 무엇이 이 친구에게 증언의 용기를 불어넣었을까. 처음 도입부에 함께 보았던 그림과 사진 자료가 아무래도 영향을 미친 듯 했다. 제니 사빌과 프리다 칼로와 같은 여성 화가들이 그렸던 자화상, 그리고 성폭력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버라이어티 생존 토크쇼>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우리도 거리의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가 될 수 있는 안내서를 만들어보자고 이야기를 처음 꺼냈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깊어지자, 남아있던 여자 친구들이 ‘같은 그림을 보면서도 여자애들은 아픔을 느끼는데 남자애들은 히죽거리는 태도를 보였다.’면서 스토리텔링 모임을 여자들끼리 진행하면 안되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여자들끼리 모였을 때 더 깊은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다음부터는 모임에 안정적으로 들어올 수 있는 여성청소년들로만 모이기로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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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끼리 모인 세 번째 모임은 ‘여자로 산다는 것’을 주제로 잡아 진행했다. 먼저 진행자인 내가 ‘내가 여자라고 느꼈던 순간들’을 사진 자료를 통해 털어놓은 뒤, 여자라서 좋았던 때와 싫었던 때를 이야기 나누었다. 왜 속옷검사를 하냐, 왜 교복바지를 못 입게 하냐, 같은 잘못도 여자가 하면 더 혼나고 여자라서 봐주고 왜 그러냐, 여자가 운전하면 왜 쌍소리 하냐 등등 다소 뻔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었다. 참여한 친구들이 ‘여성’이라는 거울에 자기를 비춰본 경험이 적어서이기도 하겠고, 여자로 산다는 것이란 주제가 수다를 떨기에는 다소 넓은 주제였다는 느낌도 들었다.

네 번째 시간은 ‘성과 연애’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애는 많이 해볼수록 좋을까, 결혼보다는 동거가 나을까, 남자는 다 늑대일까, 다른 스킨십보다 섹스는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까, 여성이 성욕을 표현하는 건 여자답지 못한 걸까 등 준비해간 질문들을 하나씩 던지면서, 그에 대한 친구들의 의견을 OX판으로 표시하도록 한 다음 이야기를 풀어갔다. 남자가 섹스를 원해서 부르면 하기 싫어도 간다는 한 친구의 말에 주위 친구들이 모두 발끈해서 언성을 높이기도 했고, 한 친구가 어릴 적 동네 할아버지와 동네 오빠에게 성폭력을 당했던 경험을 털어놓자 다들 숙연해지기도 했다.

휴가철과 EXIT 버스의 해변 아웃리치 계획으로 7, 8월을 건너뛰고 9월에서야 마지막 모임을 하게 되면서, 마지막 모임의 주제를 따로 잡지는 못하고 ‘서로에게 궁금한 것’을 적어 질문을 받은 이가 답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람에겐 네 개의 방이 있대. 첫 번째 방은 나만 아는 나, 두 번째 방은 남만 아는 나, 세 번째 방은 나도 남도 아는 나, 마지막 네 번째 방은 나도 남도 모르는 나. 우리가 모임을 하면서 세 번째 방이 점점 커져왔지? 그러면서 더 알고 싶은 것도 많아졌을 거야. 무엇이든 자유롭게 물어보고 원하는 방식으로 각자 답을 해보자.” 처음에는 쪽지에 질문을 적는 것을 어려워하더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들여 질문을 떠올려 적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차올랐다. ‘☆☆아, 오늘 하루 어떻게 보냈니?’, ‘○○아, 너는 어떤 말을 들을 때 제일 화가 나니?’, ‘★★아, 주위에 닮고 싶은 사람이 있어?’, ‘△△아, 너는 어제 어디서 잤니?’, ‘☆☆아, 너에게 ○○이는 어떤 의미야?’.
뭘 먹었는지, 어디서 잤는지와 같은 질문이 처음에는 사소해 보였지만, 곧 이 친구들처럼 떠도는 이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어제 어디서 잤냐는 말은 왜 집에 들어가기가 싫은지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레 옮겨졌고, 간신히 간 학교에선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가 또 드러나게 됐다. 누군가의 하루가 어땠는지 궁금해한다는 건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자, 친구들이 ‘아~’ 감탄사를 내뱉기도 했다. 나이 차이가 있지만 친구처럼 항상 붙어 다니는 두 친구는 서로에게 엄마이기도 하고 아빠이기도 하고 언니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관계가 더 깊어지기도 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개굴은 어떤 느낌이에요?”

나에게 온 쪽지들 가운데는 마지막 소감을 묻는 질문이 있었다. 버스에 처음 왔을 때랑 마지막날인 지금 마음이 어떤지 궁금해해주다니! 마치 숨어있는 보조 진행자가 날 도와주려고 부러 쓴 질문처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내게 마음을 열어주고 품어줘서 너무 고맙고, 스토리텔링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나도 더 자란 것 같아. 예전에 청소년노동 실태조사 할 때 들꽃 쉼터에서 생활하던 친구가 증언을 해주어 큰 힘이 되었는데, 그 친구를 보면서 자기 스토리를 엮어 풀어낼 수 있는 힘이 있는 친구구나 감동한 적 있었어. 그런데 이번에 버스에서 그대들을 만나면서 그대들에게도 그런 힘이 있구나를 절절히 느꼈던 것 같아. 고마워. 덕분에 많이 배웠어.”
아마 이렇게 주절거렸던 것 같다. 이 감동의 힘을 모아 10월부터는 매주 한 번씩 스토리텔링 시즌2 모임을 갖기로 했다. 하반기 몹쓸 일정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불금(불타는 금요일) 밤을 오롯이 바쳐야 하지만, 그 친구들과의 만남이 기다려진다. 이야기를 나누는 기쁨, 인권이라는 개념을 한 번도 쓰지 않으면서도 인권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는 대화를 모색하는 설렘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올해 들 활동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일이 뭐냐고 누군가 물어보면, 단연코 그이들과의 만남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인권적인 인권교육

최근 출판사 민들레에서 펴낸 우치다 타츠루의 『스승은 있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에게 깊은 성취감을 가져다주는 대화라는 것은 ‘말하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것’이 먼저 있어 그것이 두 사람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말이 왔다갔다하고 나서야 비로소 두 사람이 ‘말하고 싶었던 것’과 ‘듣고 싶었던 것’을 알게 됩니다.” 참으로 그럴 듯한 말이다. 스토리텔링이 교사와 학생이라는 전형적 관계를 해체한, 가장 인권적인 인권교육이 될 수 있다면, 바로 이와 같은 진정한 대화의 기쁨을 빚어낼 때가 아닐까 싶다.

– 개굴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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