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날다] 법.정책 교육이 빠지기 쉬운 함정들
법.정책 중심의 교육에서 감수성 녹여내기

인권교육은 질문을 던지는 교육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답을 제시하는 교육이어야 하는가. 인권교육이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어디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교육의 구성과 초점, 진행 방식이 사뭇 달라지는 것은 분명하다. ‘인권교육센터 들’은 오랫동안 질문을 던지는 교육이야말로, 인권에 대한 지식보다 인권감수성을 일깨우는 교육이야말로 참여자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되는 결실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왔다. 그러다 보니 기획단계에서도 체험과 토론을 통해 감수성이 자연스럽게 꽃필 수 있는 참여형 교육 프로그램을 설계하는데 많은 공을 들이고, 실행단계에서도 프로그램 진행에 시간을 많이 배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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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얼핏 참여형 프로그램을 설계하기가 만만치 않아 보이는 교육들도 많다. 대규모 인원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교육, 단시간 내에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고 생각되는 교육의 경우가 그러하다. 특히 최근에 공무원, 사회복지사, 교사 등 갈수록 인권교육이 의무화되는 대상들이 많아지는 추세이다 보니, 대규모 청중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따라야 할 법, 변화된 정책 흐름, 조심해야 할 행동의 목록들을 단순 열거하는 방식으로 인권교육이 진행될 가능성도 크다.

교육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이들이 ‘단시간 내에 답을 확실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유혹에 시달리다 보면, 외려 애초 이 교육을 통해 성취하고자 했던 목표는 저 멀리 달아나버리게 된다. 법과 정책을 알리는 글자들만 빼곡하게 들어찬 ‘파워포인트’는 누구 말마따나 파워도 없고 포인트도 없기 십상이다. “법과 정책을 중심에 두되 감수성을 동시에 꽃피울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요?” 주로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성(性) 인지 교육’을 기획하고 있는 여성가족재단의 초청으로 진행한 교육에서 나눴던 고민들을 몇 가지 소개해본다.

달리는 교육가, 멈춰선 참여자 – 놓치기 쉬운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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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기획하는 이들이 흔히 놓치기 쉬운 질문은 ‘왜 알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교육가는 일상적으로 그 주제에 대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다 보니, 알아야 한다는 전제 위에서 교육내용을 준비한다. 반면 참여자들은 억지로, 받으라니까 어쩔 수 없이, 별생각 없이 그 교육에 와 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의무화된 교육의 경우 90% 이상의 참여자가 ‘참여자’가 아니라 자리만 채우고 있는 ‘참석자’일 뿐인 가능성이 높다. 당연히 교육가가 많은 내용을 쏟아내도 마음을 움직이기는커녕 귓등으로 흘려들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교육가는 달리는데 참여자는 걷거나 멈춰서 있다면, 그 교육은 억지가 되거나 아니면 하나마나한 시간 때우기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면서 교육가는 참여자들의 태도를 탓하는 오류를 범한다.

교육가가 참여자가 서 있는 곳에서 함께 출발하려면 법과 정책을 알아야겠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작업부터 먼저 시작해야 한다. 그러려면 ‘문서’의 바다로 풍덩 뛰어들기에 앞서 ‘현장’이 강의실 안으로 초대되어야 한다. 노동현장이 먼저 초대되어야 노동법이 궁금해지고, 여성의 삶이 먼저 초대되어야 여성정책이 궁금해지는 법이니까. 노동현장을 직접 재현해본다거나 가장(家長) 중심의 실업정책에서 여성 가장은 흔히 소외되기 쉬움을 깨달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먼저 체험해본 다음이라면, 법과 정책을 좀 더 잘 알아야겠다는 참여자의 동기도 형성될 수 있다.

법의 언어 vs 일상의 언어, 법전 vs 법을 넘어선 상상력

나누고자 하는 교육 내용을 짤 때도 몇 가지 점검해야 할 지점이 있다. 먼저 교육을 이끌어가는 언어가 법의 언어인가, 일상의 언어인가를 짚어보면 좋겠다. 대개 법전에 담긴 개념이나 문장들은 웬만한 사람이면 이해하기 힘들고 지루한 말들의 연속이라 뜻을 헤아리기도 전에 사람들을 돌아서게 만든다. 그래서 법 조항이나 정책 내용을 소개하더라도, 생동감 있고 구체적인 일상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말대꾸할 권리’, ‘무릎 꿇지 않을 권리’, ‘똥 싸고 싶을 때 똥 쌀 권리’와 같은 말들은 법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문제적 현실과 인권이 추구하는 지향점을 동시에 드러내는 살아있는 언어다. 노동자가 일하기 전에 근로시간, 임금, 쉬는 시간 등을 사용자와 합의해 적어놓는 문서를 법에서는 ‘근로계약서’라고 부르지만, 알바에 찌든 고등학생은 ‘노예계약서’라고 말했다. 이런 언어가 법률보다 더 현실적인 언어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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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자를 ‘법의 독자’로 볼 것인가, ‘법의 저자’로 볼 것인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이미 쓰인 법을 읽도록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교육은 지루한 법 조항의 나열로 그치기 쉽다. 반면 참여자들이 법의 저자가 되어 법을 직접 써보고 이미 만들어져 있는 법 조항과 비교해보는 작업을 거친다면, 애초 교육가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참여자들이 교육 내용에 빠져들 수 있다. 법을 만들어낸 것은 그 법을 통해 고치고 싶었던 현실이다. 법의 저자가 된다는 것은 바꾸고자 하는 현실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어떤 법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경험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최저임금으로 살아가는 한 가족이 최저임금으로 빠듯한 한 달 살림을 꾸려가면서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간접적으로라도 체험해봐야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기준이 대체 뭐가 문제인지도 보이지 않을까. 최저임금법을 고쳐 쓴다면 어떻게 바꿔야 할지도 스스로 고민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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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법・정책 교육이 ‘지금까지’에 머물 것인가, ‘지금부터’ 그 너머를 꿈꿀 것인가를 되짚어보는 것도 필요하다. 흔히 법・정책 교육이라고 하면 이미 만들어져 있는 법과 정책을 소개하는 교육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청소년을 위한 노동인권교육이라고 하면 근로기준법을 소개해야겠구나, 임금을 떼이면 신고할 곳을 알려줘야겠구나 생각하는 식이다. 그러나 인권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법이 아니라 법을 뛰어넘는 상상력이어야 한다. 현실의 법을 알고 나면 당장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과잉 기대를 갖다가 법의 한계를 알고 돌아서는 이들이 적지 않다. 법을 집행하거나 따라야 할 공무원들의 경우에는 법대로만 하면, 법에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받아들일 가능성도 높다. 그래서 상상력이 중요하다. 현실의 법이 침묵하고 있는 ‘바깥’을 상상할 수 있을 때, 교육이 끝난 이후에도 참여자들은 법의 저자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 교육에선 불가능한 얘기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곧장 이런 반박, 아니 하소연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러면 좋겠지만 백 명, 이백 명 모여 있는 곳에서 어떻게 참여 프로그램이 가능합니까?” 인권교육을 진정 하고 싶다면 소규모 교육으로 모두 바꾸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대꾸하고 싶지만, 형편이 안 되는 경우도 많다. 어쩔 수 없이 대규모로 진행해야 한다면, 그 조건 안에서 가장 인권교육다운 교육을 시도해봐야 한다. 다른 한편 대규모 교육에서는 일방적 강연만 가능하다는 생각은 편견이기도 하다. 강연에 앞서 참여자 중 몇 사람을 앞으로 초대하여 OX 퀴즈 형식으로 경험이나 생각을 풀어내는 인터뷰를 진행해볼 수도 있다. 기본 설정만 알려주고 몇 사람을 무대로 초대하여 상황극을 돌려본 다음,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함께 찾아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도 있다. 이때 참여자와 나눈 대화 내용을 접목하여 이후 강연을 진행한다면 참여자들이 강의실 안으로 갖고 들어온 틀을 깨거나 확장하는 데도 더 효과적이다.

인권교육의 새로운 과제

그동안 외로운 외침이었던 인권운동의 요구들이 법률이나 조례, 정책으로 제도화되면서 인권교육 또한 확산되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의무화된 인권교육이 법・정책의 일방적 전달에 그치면서 참여자들을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방관자나 기피자로 만든다면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늘어날 수밖에 없는 법・정책 중심의 교육이 자칫 빠지기 쉬운 함정을 피해갈 수 있도록 안내하고 기본 방향과 내용을 설정하는 데 인권교육가들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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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3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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