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살짝쿵] “노인이 아니라 어르신이 되라”고?

최근 몇 년 전부터 ‘꼰대가 아닌 선배 시민 되기’라는 이름으로 곳곳에서 노인 강좌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서울에 한 구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강좌가 진행되었고 담당자분께서 ‘인권교육’을 포함했으면 좋겠다는 뜻에 따라 이 과정 중 노인인권교육을 진행할 수 있었다. 복지관이나 기관 종사자의 인권감수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1. 어르신에서 시민으로

우선 ‘선배 시민되기’ 강좌들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찾아봤다. 이곳저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선배시민되기> 강좌에서는 ‘노인은 돌봄의 대상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선배로서 지혜를 가지고 후배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한평생을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온 삶들이 대부분이다. 노년기를 맞이하며 적절한 돌봄은 당당히 요구되어야 하고 무엇이 적절한 돌봄인지, 존엄을 기반한 돌봄은 어떤 형태의 돌봄인지 고민해야 할 사회의 몫이 질문되어야 한다. 그런데 또다시 후배를 위해 헌신하라니… 무언가 찜찜하여 관련 강좌들을 더 찾아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선배시민이 되기 위해 자주 등장하는 글 한편을 발견했다. 놀라웠다. 노인 혐오를 조장하고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문장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나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는 글이 아닌가. 교육을 준비하다 말고 분노가 치밀었다.

노인이 되지 말고 어르신이 되라

이 글은 3가지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나, 노인에 대한 기존 사회에 혐오를 조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둘, 개인적으로 노인이 갈고 닦아 어르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로써 개인의 생애 과제로 남겨지고 말았다.
셋, 노인들 스스로도 자신을 혐오하도록 만들고 있다. 스스로 구조나 자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과연 참여자들은 이 글을 얼마나 공감하고 있을까? 노인과 어르신에는 어떤 차이를 느끼고 있을까?
평생 의무로 살아왔던 이분들이 노년기에도 어르신이 되어야 공경받을 수 있다고 요구하는 사회에 적어도 굴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교육을 준비했다.

#2. 대한민국에서 노인으로 산다는 건

얼마 전 인상 깊게 보았던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다양한 시민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장면에서 당사자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종종 인권교육 활동에서 사용한다. 최근 60대의 한 초대손님과의 다섯 글자로 자신의 최근 삶을 표현해 보는 장면에서 “너무심심해”라는 대답에서 정년퇴직 후 생겨난 시간에 대한 이슈를 엿볼 수 있었다. 참여자들은 이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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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에서 방영하는 <유 퀴즈 온 더 블럭> 프로그램의 한 장면

퇴직후육아 / 시간이없어 / 즐기고있어 / 잘살고있어

“내가 퇴직하는 시기에 딱 맞춰서 딸이 취직을 했어요. 시기가 딱 맞아서 그래도 내가 육아를 하게 된 거죠”, “나는 아주 시간이 없어요. 일단 자전거를 3시간~4시간 정도 타요. 뭐 뭐 할 건지 계획표를 짜맞춰놨어요”, “책도 읽고 기타도 배우고 아이들 간식도 챙겨주고 시간을 꽉꽉 채워서 즐기면서 지내고 있어요”, “시간이 많아졌으니 뭐 이런 교육도 듣고… 아무튼 잘 살고 있어요(웃음)”

참여자들의 최근 삶의 이슈는 ‘늘어난 시간에 대한 사용’이었다.  과연 참여자들은 이 늘어난 시간들을 얼만큼 주체적으로 누리고 있을까? 노인이 되면서 찾아 온 변화를 참여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먼저 ‘나를 기운 나게 하는 것’을 묻자,

“자녀들이 사업이 잘 된다고 연락이 올 때 기운이 나요.”
“늦게까지 잠을 잘 수 있어서 좋아요.”
“예전에는 시간에 쫓겨서 친구도 못 만났는데 지금은 친구나 지인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해졌어요. 제가 커피를 좋아하거든요. 카페에 가서 나만의 여유를 즐길 때 기운이 나요.”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오늘은 또 뭘 해먹을까? 하고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해 먹어요. 오늘은 비가 오니까 부침개를 해 먹으려고요(웃음)”
“시간이 많아져서 스마트폰 사용도 배우러 가고 뜨개질도 배우고… 뜨개질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거니까 시간이 잘 가요.”
“여유로워져서 예쁜 손녀도 아무 때나 실컷 볼 수 있어요.”
“일거리를 찾아서 해요. 점검도 하고 정리도 하고 수리할 것 있으면 그것도 하고. 제가 손으로 하는 건 뭐든지 잘해서 할 일을 만들어서 해요. 그럼 잡념도 없어지고…”
“운동을 해서 체력을 다져야죠. 어떨 때는 13키로~15키로씩 막 걸어요.”

참여자들은 나를 기운나게 하는 것으로 이 시간에 무언가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나를 두렵게 하는 것으로 대다수의 참여자들이 건강에 대한 두려움을 적어주셨다.

노인이 되어 나를 두렵게 하는 것

건강을 잃는 것은 대체 ‘무엇’을 잃은 것일까? 가정을 꾸리고 자녀들을 돌보고 대다수의 참여자들은 자신을 돌보는데 시간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노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생겨난 이 시간에 건강을 잃게 됨으로써 다시 단절될 시간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한다. 시간이 단절됨에 따라 관계맺기도 가능하지 않기에 더 불안해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 건강을 잃는 순간 시간과 관계는 단절될 수밖에 없을까?

그 중 한 참여자가 “늙음. 상대가 나를 ‘노인’으로 볼 때”라는 이야기를 적어 주셨다. 어떠한 이야기인지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보니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 때문에 정작 본인도 ‘노인’으로 비춰지고 싶지 않다는 얘기였다. 노인과 어르신 어떤 차이가 있는지 묻자 ‘어르신’이라고 불릴 때 존경받는 느낌이라는 얘기를 해 주셨다. 교육을 준비하며 발견했던 한편의 글에 분노하며 염려했던 그대로 참여자분들은 노인이 되지 않고 어르신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노인’이라는 정체성 자체를 혐오하고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노년기에 필요한 ‘돌봄을 요구할 권리’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나를 돌아보는 시간은 노년이 되어서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기에도, 중년기에도 늘 있어야 했다. 공부하는 시기, 일하는 시기, 그런 생애주기들을 요구함으로써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시간과 관계맺기의 자유로움은 언제나 제한되기 일쑤다. 그런데 노년에 비로소 생겨난 이 시간에도 건강과 함께 단절 될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오롯이 개인이 노력해서 지켜야 할 몫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노년이 되어 내가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되더라도 혹은 와상 상태에 있더라도, 내가 사회에서 요구하는 모습의 어르신이 되지 않더라도 사회의 몫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또는 요구하지 않더라도 응당 주어져야 하는 것! 그것이 ‘노년, 시민으로 사는 것’이다.

#3. 노년, 시민으로 살기

‘시민(市民)’은 ‘자신의 권리를 찾아 적극적으로 행위 하는 존재’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노인이 자신의 권리를 찾아 적극적으로 행위할 때 어떤 시선들이 있을까?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주인공 옥분할머니는 도깨비할머니라고 불리우는 악성민원인 취급을 당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밝히고 나서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진다. 영화 속 옥분할머니처럼 노인들이 목소리를 낼 때 시끄러운 꼰대로 낙인찍는 것은 쉽게 하면서, 봉사하는 사람이어야만 어르신으로 대접하겠다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지 않는가. 이런 이중성 요구 앞에 노인들은 시민으로서 낼 수 있는 목소리를, 요구해야 할 권리를 빼앗겼다.
‘존 맥나이트’는 “문제로 정의된 사람들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혁명은 시작된다”라고 한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어르신이 되지 않고 시민으로 살기! 그냥 한 사람으로 존엄한 존재로서, 시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사회의 몫을 요구할 힘을 되찾아야 한다.
교육을 마치고 “내 책임이 아니었다”, “이런 교육을 정치인들이 좀 들었으면 좋겠다”라는 소감을 들려주셨다. 소감을 나눠주는 참여자들의 목소리에서 짊어지고 있었던 삶의 무게를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음을, 사회에 응답을 요구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누군가는 ‘선배시민’이 아닌 ‘동료시민’으로 같은 길 위를 걸을 수 있기를 바란다.

*글쓴이: 지나(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