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살짝쿵] 농인의 목소리+몫소리를 공부하자!

 태어나자마자 청각을 잃은 소희씨
가족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는

그 마음을 담아

기가지니 AI 음성합성 기술로
세상에 없던 목소리를 선물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담다 KT 

“제 이름은 김소희입니다”로 시작하는 KT의 ‘마음을 담다’ 캠페인의 내용이다. <인권교육, 살짝쿵>5월 17일자의 “인권교육가, 자기 점검의 돛을 내리지 말라”편을 마치면서 아동인권강사과정 교육의 일환으로 진행했던 생생토크의 농인당사자 이야기 속에 배운 농인 사회와 수어의 세계에 대해 새롭게 발견한 이야기들을 이어서 전하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이 약속을 글로 옮기려다보니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목소리를 찾아준다>는 KT광고였다. 이 광고는 인공지능(AI) 기술로 청각장애인의 목소리를 복원한 것으로 목소리 유사도가 가장 높은 동성 가족의 음성을 데이터화하여 농인의 음색, 어조, 말투의 목소리를 생성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이를 만든 KT관계자는 ‘따뜻한 기술’을 기반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말해주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서 시작’됐다며 ‘이것이 삶이 나아지는 길’이라 믿는다고 한다. 교육참여자분 중 몇 분도 이 광고에 대해 묻자 그동안 답답했을 것이 떠올라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이 분들의 마음의 시발점이 청인과 농인 사이에 소통이 막혔던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 무게가 실려 있다고 해도,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방법’이 음성언어이고 이것이 ‘삶이 나아지는 길’이라는 믿음은 청인중심사회에서 구화를 강요하는 청능주의(오디즘, Audism)의 일환일 뿐이다.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다. 하지만 기술을 누가 어떻게 가져와 쓸 것인가에 따라서 사회적 효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목소리를 찾아준다는 것의 방향이 농인의 언어인 수어가 있는데, 청인의 언어로 바꾸는 방향으로만 나온 것은 농인의 고유한 언어를 부정하는 것이자 청인중심사회를 더욱 공고히 다지는 것이다. 오랫동안 장애인권운동은 장애 문제를 장애인의 문제로 만드는 사회에 맞서 싸워왔는데 과학기술의 발전이 장애인도 비장애인의 사회로 ‘편입’이 가능하다는 이런 식의 광고들이 늘어갈수록 농인의 ‘목’(에서 나오는)소리를 살렸을지는 모르지만, 농인이란 존재 자체의 (사회 안에 자리가 있는 존재로서의)‘몫’소리는 잊혀지게 해서 농인 존재에 대한 포함된 배제를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농인 사회와 접속하며 새롭게 알게 된 것들

인권은 기술을 등에 업고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되돌리려는 시도에 맞서 더더욱 차별받는 당사자인 농인과의 평등한 소통을 위해서 수어의 세계에 한 발 더 다가가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농인과 청인이 서로 원활한 소통을 하려면 서로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필수적인 과정이다. 소통과정에서 수어통역이 제일 좋은 방법이겠지만 농인들이 수어를 쓰더라도 문자를 읽고 쓸 수 있기 때문에, 몇 년 사이 인권운동 현장에서는 수어통역을 배치하려 부단히 시도하지만 사정이 안 될 경우에는 문자통역이라도 꼭 넣으려 하고 있다. 그것이 그나마 소통을 열어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❶ 수어통역 vs 문자통역, 하나만 있으면 되지 않느냐고요?

생생토크에 오신 농인 당사자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수어통역과 문자통역은 둘 다 필요한 것이지, 선택지가 아니라고 한다. 청각장애인(청각장애인은 의학적/병리학적 표현) 중에는 수어를 제1언어로 쓰는 농인(농인은 언어소수자라는 사회문화적인 표현. 최근엔 인공와우 수술이 늘어나면서 수어를 쓰는 농인사회가 축소되고 있다고 함)과 입모양을 가지고 말을 하는 구화인으로 나뉜다. 이 두 청각장애인이 같은 장소에 있다고 생각해보자. 수어통역만 있다면 수어를 모르는 구화인들은 같은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문자통역만 있다면 농인들은 글을 읽을 순 있다고 해도,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고 이해하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을 요한다. 이는 한국어와 한국수어의 문법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란다. 필화는 농인에겐 제2외국어과 같은 또 다른 언어일 뿐이라고 한다. 한국어에서 ‘가구’ 라는 단어를 쓰는데 한국수어에는 ‘가구’라는 말이 없다. 대신에 ‘책상, 의자, 장롱’ 같이 사물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를 통칭하는 ‘가구’와 같은 1차 어휘가 없기 때문에 사실상 문자로 된 언어를 보고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일례로, 이야기 손님이었던 농인 당사자가 대학을 다닐 때의 경험이다. 그이는 수업을 듣기 위해서 수어통역을 신청했다고 한다. 수어로 보고 내용은 이해가 잘 되었지만 문제는 시험을 보려면 복습이 필요한데 수어를 보는 동안에 이 분은 수업 내용을 메모를 할 순 없었다. 수업을 수어통역으로 이해를 하고 이후에 문서로 된 내용을 받아야 이런 내용이구나 하고 복습이 가능하다. 그런데 사실 이분에게 한국어는 외국어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문서를 눈으로 읽기는 하지만 내용을 이해하려면 다시 수어로 번역을 해야 된다고 한다. 우리가 “I love you”라는 영어를 번역할 때 “나, 사랑해, 너”이지만, 한국말의 순서로 “나는 너를 사랑해”로 바꾸어 이해해야 하듯이, 수어의 세계와 문자의 세계는 어떤 어휘가 있고/없고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문장의 구성도 다른 것이어서 한국어로 된 책을 읽는 일은 농인들에게는 마치 영어 원서를 번역하는 것 같은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수어와 구화가 같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디테일한 지점까지의 차이는 생각지 못했기에, 이해한 만큼 보인다고 하는 말처럼 농인들이 겪는 일상적인 어려움에 대해서 깊은 이해가 불가능했었던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에 대한 세밀한 이해가 부족했을 때 수어통역을 넣는다는 것이 알리바이가 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뉴스의 수어통역이 그러하다. 또한 코로나19가 사회를 위험과 불안으로 몰아갔을 때, 청인들은 정보가 없어서 대처하기 어려웠다. 문제제기가 있고 난 후에 질병청의 재난 상황 브리핑에 이제는 항상 수어통역 같이 나온다. 하지만 농인들은 사실 그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지난번 <살짝쿵>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농인들의 입장에서 청인사회의 말을 바로 수어 통역하는 것과 농인사회에서 농인이 쓰는 수어는 다르다고 한다. 그렇기에 농인이 청인 중심의 언어를 이해하려면 청인 수어통역사가 직역을 하고 이것을 농인 당사자의 수어통역으로 의역을 했을 때, 농인들이 비로소 그 뉴스를 가깝게 이해할 수 있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수어통역은 한국어를 한국수어로 바로 직역하는 방식이어서 농인들은 이해가 어려운 것이다. 실제로 이 날 생생토크 초대손님의 부모님들은 뉴스에서 나오는 수어가 이해되지 않아 보시지 않는다고. 더욱이 작게 나오는 수어통역 화면은 얼굴표정까지를 포함하여 언어가 완성되는 수어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이날 이 분과 만나기 전에는 진행자인 나도, 교육참여자들도 화면의 크기에 대해선 중요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더욱이 글자를 읽을 수 있으니 농인들도 청인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문자독해가 되리라 마음대로 짐작했다. 세상엔 짐작과는 다른 일들이 많지만, 짐작만으로 퉁쳐선 안되는 일이 있다는 것, 알려고 공을 들여야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절감하는 시간이었다.

❷ 점차 줄어드는 농인, 수어, 농사회

최근에는 아이가 태어나서 청각장애인이라고 하면 인공 와우 수술을 시키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한다. 수술을 한 후에는 구화를 배우게 하는 추세가 늘면서 농인이 줄고 농사회도 축소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추세는 앞의 광고 사례에서도 보듯, 농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사는 사람들을 ‘장애극복의 서사 + 기술력’을 동원하여 더더욱 설 자리를 없게 하고 있다. 구화의 정상성이 이렇게 강고해질수록 농인에겐 음성언어를 쓰라는 충고와 요구가 늘어간다. 이야기 손님도 학생 때 선생님에게 주로 들었던 말이 “너도 음성 좀 써봐”라는 말이었다고. 한번은 이 분이 “내가 왜 말을 해야 되죠?”라고 했더니 “사회에는 다 음성을 쓰고 있으니 너도 말을 해야 해”라는 답변이 돌아왔단다. 음성언어에 대한 요구가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 되는 상황이 갈수록 늘어 가는데, 이는 우리 사회에 농인의 인권이 없다는 것을 선명히 보여주며 농인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저는 제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고 높낮이도 구분이 안 되는데, 더구나 내가 소리를 낸다고 해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음성으로만 커뮤니케이션을 해야합니까? 청인에게 수어를 배우라고는 안하면서 필담도 되고 카톡도 메신저도 되는 요즘같은 상황에서 청인과도 소통이 가능한데 굳이 내가 음성을 연습해서 말을 써야 되나요?”

마지막에 던진 이분의 반문이 교육참여자들의 마음에 많은 울림을 남겼던 자리였다.

❸ 편견과 혐오를 걷어낸 한국수어가 필요한 이유

한국어문법이 바뀌었는데 학교에서 교육하지 않았다면 청인사회에서는 이 문제가 크게 이슈가 되었을 것이다. 애초에 방치되지도 않았겠지만. 한국수어언어법이 개정된 지 5년이나 지났지만, 교육에 반영하지 않았다는 것을 농학교들은 이제사 인식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무려 5년이면 새롭게 추가되거나 빼야할 것들이 생겼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이미 바뀐 것도 교육되지 않으니, 없는 단어는 또 얼마나 많을까. 사실 농인사회와 청인사회의 정보량은 거의 100배 정도 차이가 난다고 한다. 아무리 차별이 만연해도 이제 청인사회에서 ‘성소수자’라고 하면 어떤 존재인지 알지만, 농사회에서는 그냥 없는 존재일 뿐이란다. 더욱이 보수적인 농사회에서 성이라는 단어를 말하면 “조용히 해, 이런 말을 입에 담지 마.”라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이런 사정이니 성소수자에 대한 표현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존재로서의 게이와 레즈비언을 어떻게든 표현해야하다 보니 필요에 의해 나온 수어는 혐오와 편견을 그대로 담은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농인LGBT 설립준비위원회는 혐오와 편견을 걷어낸 수어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생생토크가 있던 당시엔 아직 나오지 않았었지만, 현재는 새로운 수어가 만들어져 보급되었다.

한국수어책한국수어 퀴어상징

 

기존의 한국수어는 성소수자를 표현할 때 동성애자가 대체로 항문섹스에만 관심이 있고 ‘문란한’ 존재이며 에이즈의 주범이라는 편견이 기반한다고 한다. 한국농인LGBT(준)는 성수소자 인권을 다루고 있는데, 인권에 관점이 없는 수어통역의 과정에서 성소수자를 표현하는 것이 혐오적으로 전달되는 것을 보며 문제의식을 가져오다가 새로운 수어를 만드는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수어에서 게이는 “항문섹스를 하는 남자”로 레즈비언은 “여자와 몸을 비비는 여자”로 표현하는데, 이는 성소수자의 존재를 지극히 ‘성’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이어서 성소수자의 다양한 존재와 경험을 가리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다양한 현실을 반영한 수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청인사회의 인권에 관한 많은 자료들이 넘치는데, 이를 한국수어로 번역해서 농인사회에서도 나누고 싶지만, 이처럼 한정되고 편견에 치우진 표현법으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수어개발에 집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편견과 혐오를 넘어 존중과 긍정의 언어인 한국수어를 만든 이유의 또 하나이자 무엇보다 중요했던 이유는 농인성소수자가 자신의 존엄을 지켜낼 언어를 가지고 자신의 경험을 풀어낼 말의 권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인권교육은 오랫동안 소수자가 자신의 경험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낼 수 있도록 하는 방법론을 고민해왔다. 농인성소수자가 만든 새로운 존중의 언어 한국수어야말로 단지 소통의 기호가 아닌 그 자체가 바로 소수자의 권한강화라는 인권교육의 목표와 만난다. 더불어 말하는 이는 듣는 이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것의 완결점은 존중과 긍정의 수어로 소통을 나눌 수 있는 청인들이 늘어가는 것도 함께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함께 스며들기 위해서

나의 인생에서 만났던 기억이 없는 상황입니다. 오늘이 첫 경험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아직도 아니면 앞으로도 만날 기회가 있을까요? 왜 내 주변에는 (당사자들이) 없었다고 느꼈을까요? 함께 스며드는 생활이 가능하면 좋겠습니다.

– 차별받는 당사자와의 생생토크에 대해 교육참여자가 남긴 말

’당장 만나!’라는 유튜브 방송이 있다. 그 앞의 ‘장애를 이해하고 싶을 때’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이해’라는 말이 살짝 거슬리지만, 머뭇거림 없이 ‘만나’야 한다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랫동안 우리사회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고 왕래와 소통이 불가능하게 지내왔다. 2001년 장애인 부부의 지하철 리프트 추락 사건을 계기 장애인 이동권 투쟁, 탈 시설 투쟁이 일어나고, 경계를 허물려는 장애인들의 투쟁의 결과로 조금씩 연결되고 만날 수 있는 시공간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의 일상과 마주할 기회가 적다. 나 자신도 인권교육을 통하지 않았다면 다양한 장애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만난다고 당장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고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나야 일상이 보이고, 그래야 구체적으로 서로 알고자하는 노력이 일어날 수 있다, 그야말로 함께 스며들 수 있는 바탕이 열리는 것이다. 당사자와 만나는 생생토크를 기획하는 것도 바로 이런 시작점에 서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교육은 청인(음성언어를 쓰는 사람)과 농인(수어를 쓰는 사람) 사이의 냇가를 건너는 징검다리에 돌 하나쯤은 놓은 것이 되지 않았을까.
두 차례에 걸쳐서 농인과의 만남을 지상중계한 것도 이 글을 읽는 이들과도 경험의 한자락을 나누며 함께 징검다리를 놓아가길 바라서이다.

 

*글쓴이 – 정주연(루트,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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