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 그 후 – 대안 교육공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언어 찾기

필자가 한낱(날맹)이 된 이유

올해 초, 한 대안 교육공간의 교사 교육을 내가, 학생 교육을 날맹이 담당했었다. 몸담고 있는 공간을 학생들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드러내고 이를 인권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학생 교육의 목표였다. (여느 학교 교육과 크게 다르지 않게) 학생들의 노골적인 혹은 은근한 아우성이 교육 시간을 채웠다. 학생들의 목소리에 충실히 기대어 날맹은 교육 후기를 작성했고, 인권오름에 기고할 예정이었다. 날맹의 글은 신랄했고, 날맹의 분석 자체에 동의를 표하지 못할 구절은 없었다. 날맹이라는 ‘(인권의 언어를 갖춘) 번역가’ 혹은 ‘(준비된) 기록자’의 글을 통해 의미를 갖지 못하고 흩어져버리기 쉬운 학생들의 이야기가 뼈와 살을 갖추게 된 것이 참 다행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날맹의 글을 읽은 나의 마음에 한 움큼의 난감함이 피어올랐다. ‘학생들 목소리만 담겨 편파적’이라거나, ‘너무 노골적이니 수위를 낮춰야’ 한다는 따위의 검열 의식이 아니었다. 그 난감함은 내가 이미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버렸다’는 것, 그들의 서사에 대한 ‘비판적 이해’가 생겼다는 것에서 비롯됐다. 말하자면, 날맹과 나는 같은 공간에 있는 서로 다른 타자들을 만난 것이고, 그런 만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의 서사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날맹이 쓴 글에 ‘교사들의 생각은 이랬다’고 덧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학생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진실이었고, 학생과 교사의 입장 차이를 적당히 뭉개 ‘균형’을 맞추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은 아니었다. 학생과 교사가 서로 다른 언어였지만, 공통으로 짚어낸 문제의식도 분명 존재했다. 학생들은 온전히 불행하고, 교사들은 온전히 행복한 교육 공간이 어디 있으랴. 학생은 학생끼리, 교사는 교사끼리 동일한 인식 지형을 갖고 있다는 전제 역시 위험하다. 학생과 교사 모두 행복*을 꿈꾸지만, 어떤 지점에서 불행이 발생하는지 개인/관계/구조 차원의 딜레마를 아울러 살피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상임회의 때, 충분한 논의 없이 기고 주제를 확정했던 상황을 상임활동가 모두가 인정하고, 결국 기고를 보류했다. 그리고 교사들을 만날 기회가 한 번 더 남아있었던 내가 교육을 끝낸 후, 날맹이 썼던 글에 담긴 학생들의 증언과 문제의식을 곱씹어 하나의 글로 작성해보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교육했던 곳이 ‘대안’적 공간을 표방하는 곳이었기에 고민이 더 복잡해지기도 했다. 인권운동을 하면서도 느끼는 거지만, 오히려 대안을 표방하며 운동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문제가 더 간단하고, 분명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제는 외부에 있다. 외부와의 반정립이 내가 하고 있는 운동의 혹은 내가 만든 공간의 정체성이 된다. 그러나 ‘대안, 그 후’의 시간은 갈수록 힘들고, 어려워진다. 그토록 비판했던 외부와 닮아있는 나(우리)를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하나의 가치로 뭉쳤다고 생각했던 ‘우리’가 사실은 ‘우리’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지난한 내부와의 투쟁이 이어지는 운동 공간들이 많고, 상처가 곪을 대로 곪아 공간이 해체되거나 상처받은 사람들이 공간을 떠나가는 상황도 종종 발생한다. 주변에서 이를 ‘집안 싸움’이나 ‘남의 집 불구경’ 취급해서(취급할까봐) 고민을 바깥에 공개하지 못하는 경우도 상당하지 않을까. 결국엔 문제도 있고, 진통도 있지만, 결국엔 하던 대로 하는 방향을 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대안은 악이 소멸된 상태, 꿈이 현실이 된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악이 얼마나 일상적이고, 평범하며, 제거할 수 없는 삶의 일부인지를 깨닫는 과정이고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시대적 과제에 따라 꿈을 변주하는 과정이다. 대안을 과정의 언어로 이해하는 것이 말이 쉽지 실천은 참 어렵다. (요즘 뼈저리게 느낀다ㅠ) 대안을 만드는 일은 언제나 힘들기 때문에 그동안 애써서 만들어 놓은 과거에 대한 애착이 강하게 생긴다. 그럴수록 흔들린다는 것은 곧 두려움이다. 유연함은 우유부단함으로 해석되고, 경직되게 기존의 구조를 유지하는 것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옹호된다. 나는 이를 위험신호로 인식할 수 있는 민감성을 자극하는 것이 교사 교육의 목표라 생각했다. 첫 번째 교육은 교사들 스스로 공간에서 행하는 교육 활동을 떠올리며 내적 모순(딜레마)을 발견하는 시간으로, 두 번째 교육은 교육 담당자가 의뢰하신 대로 동료 교사들의 관계와 문화를 짚는 내용으로 마련했다.

이어지는 글은 날맹이 다녀온 학생 교육, 내가 다녀온 교사 교육에 비춰 대안적 교육을 실천하는 데 있어 생각해볼 지점들을 정리한 것이다. 본 교육뿐만 아니라 예전에 다른 대안 교육 공간들의 학생/교사들을 만났을 때 들었던 생각들도 녹아 있다. 그만큼 공통적인 문제의식이기에 거칠지만 글로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다.

일상의 혼란, 가치의 격돌

거의 모든 대안적 교육 공간들은 학교교육에 대한 비판 속에 탄생했다. 획일화된 교육, 가치가 사라진 교육, 경쟁만이 횡행하는 교육 등을 비판하고 자유(자발성), 평화, 사랑, 협력(공동체) 등이 살아있는 교육을 실천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실천의 주어가 누구인지다. 대안적 교육 공간들을 꾸려가는 데 학생들이 얼마나 동등한 주체로 서 있는지 자문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주로 공간을 만드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는 건 역사적으로 교사와 부모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학생들은 ‘아이들이 이러한 가치를 품고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교사와 부모의 신념 속 대상으로 위치하기 쉽다. 학생들의 형용모순과 같은 증언들 속에 실천을 점검할 수 있는 지점들이 등장한다. ‘자발성을 강요받는다.’, ‘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의식(ceremony)이 우리에겐 폭력적이다’ 등 가치의 주인공이 아닌 가치 실현의 대상이 된 학생들이 (교사나 부모가 올바르다고 여기는) 가치에 질식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교사/부모와 학생 사이의 쉽게 해소될 수 없는 권력/입장의 차이를 청소년 인권의 관점에서 깊이 사유하지 않으면, 학생들에게 그 공간은 그토록 비판에 마지않던 ‘학교’와 그다지 다르지 않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작년에 한 대안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수업을 진행했던 인권 활동가가 학생들과의 만남을 회고하며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학생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그다지 흥미로워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뻔히 안다는 반응을 취하기도 했고, 자신이 어떤 대답을 듣길 원하는지 간파해서 그 대답을 돌려주곤 수업을 빨리 끝내주길 기대했었다고. 나는 이것이 가치에 질식된 학생들이 취할 수 있는 ‘영리한’ 전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처음엔 교사/부모에게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거칠게 선언하는 과정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전략이 그다지 쓸모없음을, 도리어 더 촘촘한 강요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건드릴 수 없는 가면 쓰기의 전략을 택하게 되지 않았을까.

공간을 만들 당시 올바르다고 생각했던 가치를 무조건적인 ‘선’의 위치에 두면, 그 가치에 동의하지 않는 존재는 아직 깨우치지 못한 자, 혹은 ‘우리’가 구축한 ‘선’을 방해하는 ‘악’으로 설정될 수 있다. ‘악’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악’을 닮은 모습으로 실행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부터 딜레마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모두가 동일한 신념과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것, 동일성의 오류로부터 벗어날 때 비로소 일상의 혼란을 제대로 겪을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일상의 혼란을 제대로 겪는다는 것은 가치의 격돌을 회피하지 않는 것이다. 대안 교육 공간들에서 지속적인 논쟁의 주제로 남아있는 휴대전화 사용을 예로 들어보자. 이는 꼭 교사/부모 vs 학생의 대립으로 논쟁이 벌어지진 않는다. 공간의 전통과 원칙을 지키려는 이들은 생태적 가치 (휴대전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 파괴 등)에서부터 소통의 중요성 (휴대전화에만 매몰되어 서로에게 관심을 잃는다 등)을 근거로 제시해 휴대전화 사용을 전면금지하거나, 제한하자는 주장을 한다. 이에 대해 사생활/통신의 자유 등을 근거로 제시해 규제를 반대하는 이들도 분명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쟁점은 ‘사용(허용) vs 규제’ 이지만, 이는 잘못 설정된 프레임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쟁점 아래에는 소통, 공동체, 자유를 둘러싼 수많은 가치의 격돌이 숨어있다. 이 ‘좋은 말’들을 누가,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가치의 의미가 너무도 달라진다.

가치에 대한 이견은 본 교육의 교사들 사이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교육에서 교사들에게 ‘공동체’라는 가치 낱말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이 말을 쓸 때 갸웃거려지는 상황을 적어달라고 부탁을 드렸었다. ‘개인의 특성을 인정해주지 않을 때’, ‘우리도 교사 공동체지만 마음을 나누고 있을까. 실체가 없게 느껴진다.’, ‘공동체라서…연대책임 진다.’, ‘모두가 Yes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관심 없는 데 관심 있는 척 해야 하는 상황’ 등을 적어주셨다. 가치에 대한 이견은 교육 활동에 대한 이견과 연결되기도 한다.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활동 중 ‘대안적인 실천이라 생각하는 것/딜레마를 느끼지만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실천/사라져야 할 실천’을 구분해서 적어보는 개인 활동을 진행했을 때, 같은 실천이 서로 다른 카테고리에 놓여있는 것을 보며 교사 분들이 놀라워하기도 했다. ‘우리’ 안의 차이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가치에 대한 총체적 점검이 이루어지 않을 때, 가치는 형식화된 도덕으로 변질된다. ‘(나는 원하지 않지만) 공동체 생활에서는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는 것이 있다.’는 본 교육 학생들의 증언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가치의 점검을 통해 인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넓혀가는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둘 수 있는 관계, 제도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나 역시 고민 된다.

‘말발(말빨)’의 감옥

대안 교육 공간은 기존의 학교에 비해 좀 더 민주적인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학생, 교사 등공간의 구성원이 발화할 수 있는 더 많은 절차와 통로들을 확보하고 있고, 이를 반영해 공간을 운영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절차와 통로가 열려있다고 해서 곧장 민주성을 보장하진 못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할 수 없는 이들은 공론장에서 큰 힘(정치)을 발휘하기 어렵다. 더욱이 다수가 채택하고 있는 가치/논리와 다른 견해를 제시하는 이들은 줄곧 ‘소수’의 자리에 위치하기 쉽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인권의 언어를 벼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 한 마디를 ‘발명’하기 위해 ‘힘없는 자들’, ‘말 없는 자들’이 무수한 싸움을 거쳐 온 과정이 인권의 역사임을 상기시켜도 좋을 것이다. 실질적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원과 발언력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서 ‘자리가 열렸는데, 왜 말이 없냐’ 거나, ‘논리적으로 설득해보라’고 말하는 것은 잔인하다.

‘의견을 내도 소용이 없다’, ‘결국 선생님들의 의견 위주로 결정 된다’, ‘(후배로서) 선배들이 의견을 강하게 내면 더 이야기하기 어렵다.’, ‘마음에 안 드는 규칙이 있지만, 그 규칙을 바꾸기 위해 해야 하는 장시간의 형식적 회의가 싫어서 의견을 내지 않게 된다.’ 등 학생들의 말은 무기력과 자기검열,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의 연결성을 보여준다. 학생들은 공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주요 자원으로 ‘말발’을 꼽았는데,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맥락은 아래 날맹의 이야기로 대신하고자 한다.

학생들이 “의견을 내봐야 소용없다”는 마음을 갖게 된 맥락을 더 짚어보고 싶었다. 자신들이 그린 ‘서열 피라미드’에도 표현을 했지만, 학생들은 설령 바꾸고 싶은 게 있더라도 회의 자리에서 교사들을 이길 수 있는 ‘말발’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표면상 절차는 매우 민주적인 것 같은데, 결국 결정은 ‘말발 있는’ 교사의 의견대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학생들은 “어차피 안 바뀔 거”란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말발’ 얘기를 들으며 난 사실 좀 뜨끔했다. ‘말의 정치’ 얘기를 정리강연에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바로 그 부분이 학생들에게 가장 답답한 부분인 것으로 드러났으니 말이다. ‘세련된 언어’로 포장되지 못한 주장이나 논리는 ‘구성원 모두가 동등한 발언권과 의사결정권을 가진 민주적 회의’에서 다른 ‘세련된’ 주장 앞에 깨갱하기 쉽다는 이야기를 학생들은 ‘말발’이란 단어로 표현한 것이었다. (…) 교사들에게 면전에서든 회의에서든 따박따박 되받아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네 관계가 보통은 그렇지 않나. 상황이 끝나고 나서야 뒤늦게 이렇게 말해줄 걸 하는 후회와 아쉬움에 혼자 머릿속으로 그 상황을 다시 곱씹는 경우들. 면전에서 “감정적이지 않은 이성적 언어”로 자기주장을 바로 할 수 있는 상태로 매번 대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간이 지나 다른 자리에서 “이미 끝난 일 가지고 문제제기하는 쪼잔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으면서 문제제기를 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갈등상황을 폭력이 아닌 말로서 풀어나간다는 일반적 원칙도 중요하지만, 그 ‘말의 정치’ 속에 그 집단이 지향하는 바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집단이 합법적으로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기억될 필요가 있다. ‘말의 감옥’에 갇혀 누군가의 말은 발화조차 되지 못하고 공동체 바깥에서 떠돌고 있진 않은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학생들이 교사들 특히 ‘말발 센’ 교사들에 대해 갖는 감정은 양가적이기도 했다. 그걸 확인한 것은 ‘말발’에 밀려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지 못할 때 부당하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한편으론 자신들도 그렇게 논리정연하게 말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였다. 비폭력의 가치가 ‘말의 감옥’이 되어버렸을 때, 자신도 똑같이 ‘말발’을 키우는 것을 우선 목표로 하기보단 그 부당한 구조 자체를 해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비폭력의 정신에 가까울 것이다.

– 날맹의 학생 교육 후기 중 일부 요약

학생 교육뿐만 아니라 교사 교육에서도 ‘말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했다. 경력이 오래지 않은 교사들의 경우 특히 지적 받는 게 두려워 발언을 멈추거나, 결국은 내가 미숙해서 벌어지는 일이니 내가 극복해야 하는 일이라 느낀 경험을 갖고 있었다. 교사들 역시 반복되는 장시간 회의가 문제라고 짚었다. 회의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회의에서 재미(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교사들이 상당수였다. ‘재미있는 회의가 가능할까요?’를 질문했을 때, ‘그랬던 적이 있다. 서로 생각을 주고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때가 있었다’고 말하는 교사 분의 이야기를 받아 안아 회의가 즐겁기 위한 조건에 대해 대화하기도 했다. 결국 핵심은 동료성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대안을 계속 만들어 간다는 것은 지치고, 힘들다. 그럴 때 내 옆에 있는 동료에게 기댈 수 있을 때, 동료를 믿고 책임을 공유할 수 있을 때 질척이는 발걸음을 한 발짝 뗄 수 있다. 이 동료성을 확장해 교사-학생 간에도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하는 건 너무 큰 바람일까. ‘말발의 감옥’은 서로가 서로를 방어해야만 하는 관계일 때 더욱 굳건히 선다. 정말 대안적 공간과 세계를 꿈꾼다면, ‘말발’이 세다고 해서 승자라고 볼 수도 없다. 대안은 홀로 구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만두고 싶은 순간을 적어달라고 부탁드렸을 때, 절반 정도의 교사 분들이 ‘외롭다고(혼자라고) 느낄 때, 사람이 그리울 때’를 적어주셨다. ‘나라는 존재가 걸림돌로 느껴질 때’를 적어주신 분의 쪽지를 받아들었을 때는 잠시잠깐 나 역시 울컥하기도 했다.

‘남아있는’ 사람들의 언어 찾기

교육을 진행하면서 눈길이 가는 교사 분들이 있었다. 두 번의 교육 동안 내 눈을 거의 마주치지 않는 교사 분들이 두 명쯤 있었는데, 미루어 짐작하건데, 교육 내용을 불편해하시는 듯 했다. 그분들의 마음이 종종 개별 활동 미션지에 적혀 나오기도 했다. 오랫동안 이 공간에 머문 분들의 경우, 공간에 대한 애착과 자기 동일시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그런 만큼 무한 책임을 느꼈고, 실제로 자기 시간의 대부분을 공간에 대한 헌신으로 채우고 계신 것 같았고, ‘예전만큼’ 공간에 애정을 갖지 않는 신규 교사들을 조금은 답답하게(혹은 안타깝게) 느끼고 계셨다. 새로 공간에 진입한 교사들은 이러한 교사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터였다. 공간을 ‘사유화(자기 것처럼 생각함)’한다고 느낄지도 모를 일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경력 교사와 신입 교사 사이의 갈등처럼도 보이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닐 것이다. ‘무엇이 우리 모두를 외롭게 만들고 있는가.’ 나는 이것을 사유할 수 있는 언어를 이 공간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분들이 갖추게 되길 바랐다.
나는 요즘 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활동 연차가 쌓여가고 있기 때문일까. 때때로 활동에 지쳐 그만두고 싶다가도, 내가 남아있는 이유를 곱씹어 떠올려본다. ‘남아있다’는 건 구태의연함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남아 있는’ 사람이 있어야 ‘그 후’가 가능하다. 남아서 실천을 하든, 목격을 하든, 잘 정리를 하든. 새로운 것에 떠밀려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남아서 자신의 몫을 해내고, 자기가 발 딛고 있는 곳의 밑바닥을 직시할 줄 아는 그런 사람. 그래서 변화할 줄 아는 사람. 그 사람들의 언어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한 번 이 곳의 분들을 만나고 싶다.

* 모순이 사라진 말끔한 삶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글거리는 느낌의) 행복이라는 단어를 잘 쓰지 않는데^^;;; ‘각자가 살고 싶은 모양새로 살 수 있는 상태’ 정도로 이해해주시면 좋겠다.

** 합의되지 않은 가치나 원칙을 규칙으로 만들어 강제하거나, 다수결을 민주주의와 등치시키는 일 등.

⁍ 정리 ‖ 한낱(날맹)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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