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어요]차별금지법과 함께, 페미니즘과 함께, 우리가 전진하자
"우리는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글쓴이: 미류 (인권운동사랑방/차별금지법제정연대)

미류 발표 모습

#1/ 함께 전진할, 차별금지법과 페미니즘이 놓인 자리

제헌헌법에서부터 평등은 선언되었다. 그러나 반공을 국시로 하는 독재 체제에서 평등은 입에 담기 위험한, 불온한 말이었다. 87년 체제는 평등을 되살렸을까? 1995년 ‘여성발전기본법’이 제정될 때 ‘남녀평등기본법’도 발의되었다. ‘여성발전’이라는 용어에 문제제기하는 의원이 있었지만 평등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1999년 제대군인가산점제도가 폐지되었다. 89년 공무원임용시험에서 남성우대 할당제가 폐지되자 군가산점의 문제가 차별로 인지되기 시작했고 평등은 전진했다. 그러나 군가산점 폐지는 역차별 논란에 불을 붙였다. ‘성평등기본법’으로의 개정이라는 오랜 요구가 2015년 국회에서 ‘양성평등기본법’으로 왜곡되고 만다. 평등은 이제 불온한 말은 아닐지 몰라도 비틀린 말이 되었다.

박근혜 퇴진 촛불 이후 2017년 체제로의 전환을 설파하는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여전히 “평등과 차별금지가 사회적 가치로서 충분히 한국사회에 통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김정혜) 공공연히 여성을 ‘미발전’된 존재로 만드는 일은 없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이 평등인 양 ‘남녀평등복무제’가 거론되는 것이 현실이다. 남성만 징병의 대상이 되는 것을 ‘체력 차이’로 승인한 헌법재판소의 논리는 경찰에 여성이 부적합하다는 고정관념을 뒷받침하고, 체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등한 기회를 보장하겠다며 체력시험 기준을 달리하는 것에 논란이 붙을 때는 뒷짐을 진다. 여성은 차이를 승인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상황에 갇힌다.

‘촛불 대선’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성소수자’와 ‘차별금지법’을 비가시화하기로 작정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도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에서 삭제되지 않았던 ‘성소수자’ 항목을 지웠다. 차별금지도 ‘법 제정 추진’에서 ‘방안 검토’로 후퇴시켰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다. 사회구성원 중 특정한 집단을 누군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집단으로 만들어버렸다. 평등은 관용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면 받아들이겠다는 말. 받아들이는 만큼 뭔가 쥐어주겠다는 말. 그러나 우리가 동등한 시민으로서 사회에 등장하지 못한다면 ‘받아들일 준비’는 불가능하다. 배제의 선을 거두지 않겠다는 말일 뿐이다.

평등은 비틀린 채 멈춰있고 배제의 선은 더욱 견고해졌다. 역차별 주장을 회피하려는 ‘양성평등’이 성소수자를 배제하는 ‘양성평등’과 만났다. ‘여성’일 때에만 포섭되는데 포함되더라도 ‘남성’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된다. 차별금지법과 페미니즘이 놓인 자리다.

 

#2/ 차별금지사유라는 쟁점

차별금지사유는 정체성을 지칭하는 언어가 아니다.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은 발달장애아동의 비장애인 부모가 겪기도 하며, 인종과 종교를 이유로 한 차별은 무슬림 남성과 결혼한 내국인 여성이 겪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차별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소수자를 특정하는 방식으로 차별을 표현하기도 한다. 여성, 이주민, 장애인, 성소수자 등에 불리한 대우를 금지하는 방식으로. 그러나 표현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느 쪽이든, 우리가 차별을 ‘발견’하고 ‘해석’하고 ‘대응’하며 ‘철폐’하는 과정을 사회적 경험으로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이주배경에서 비롯한 다양성에 대한 항목은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국적, 용모 등 신체조건, 종교 등 다양한 차별금지사유로 표현되었는데 그 의미와 논점에 대한 논의가 매우 미비하였다.”(이소훈)는 지적은 비단 이주배경과 관련된 차별금지사유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2007년 차별금지법이 발의될 때 차별금지사유가 삭제된 사건은 차별금지법을 특정한 정체성과 결부시키는 방식을 강화했다. 성소수자는 삭제된 존재라는 역설적 방식으로 사회에 등장했다. 그러나 동시에 기업은 성소수자를 광고에 노출시키거나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하는 시장을 만들어낸다. 국가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이주민을 드러내왔다. 정체성이 삭제된 것이 아니다. 세계의 질서에 맞서 권리를 주장할 때에만 누군가 삭제되고 있다. 차별금지사유는 이러한 권리 주장의 과정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특정한 정체성이 혐오의 대상이 되고 사회적으로 봉인되는 현실에 맞서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노력이 이어졌다. 교차성이 중요한 열쇠말로 부각되었고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이나 ‘복합차별’의 개념이 강조되었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결혼이주여성 통번역지원사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내 한국인 직원과 달리 호봉 기준이 없어 임금 차별이 발생하고 있다. 게다가 2년마다 한국어능력시험 성적 갱신을 요구받는다. 남녀고용평등법만으로 차별을 다투기 어렵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제 조금 다르게 질문을 던져볼 때는 아닐까? 비장애/내국인/고학력/이성애/시스젠더 여성에게는 차별금지법이 필요 없는지.

양성평등기본법이 성차별 금지를 명시하고 있지만 성차별을 실질적으로 다룰 수 있는 법이 아니라는 점이 꾸준히 지적되어왔다. 성차별 피해자가 권리를 주장하고, 차별을 시정하고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상세 규정을 담은 법이 필요한 것이다. 성차별은 이제 없고 역차별이 더 문제라는 주장이 난무하는 시대에 우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성차별을 주장할 수 있는가. 차별을 말하는 익숙한 방식은 어떤 지표들의 집단 간 차이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성별임금격차나, 장애인빈곤율, 비정규직 4대보험 가입률 등. 이런 방식은 차별을 다시 정체성의 문제로 귀속시킨다. 그리고 정책의 재료가 된다. 지표를 개선하는 것이 목표가 될 뿐, 불평등의 현실을 살아가는 나와 우리가 싸울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아직 충분히 권리를 주장하지 못했다.

성차별적 조직 문화를 넌더리 나게 겪고 나면 프리랜서로 일할 방법을 알아보는 여성들이 있다. 웬만해서는 자리를 잡기 어렵다 보니 플랫폼 노동 이라는 이름으로 착취 당한다. 일을 구하기 위해 얼굴과 실명을 공개해야 할 때 여성과 남성의 부담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것을 차별로 주장하며 싸울 수 있을까. 여자라고 무시하는 클라이언트에게 “얕보이지 않으려고 준비”하는 것 말고 다른 싸움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차별적인 면접 질문들에, 대처법 말고 퇴치법을 만들 수 있을까.

집회 현장에서 경찰에 가로막히면 집시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싸운다. 그게 얼마나 소용없는 일인지는 잘 안다. 경찰은 일단 길을 막고 버티고 집회는 무산되기 일쑤다. 그러나 인권단체들은 집회를 여는 사람들에게 ‘집회 시위 제대로’ 하기 위해 필요한 법의 정보를 알리는 노력을 했다. 경찰은 꿈쩍 않지만, 우리가 당당하다. 우리가 옳다. 법이 늘 우리 손을 들어주지 않더라도 차별을 따질 수 있는 근거지가 있다면 달라지는 풍경이 비슷할 듯하다. 집회시위의 자유가 그렇듯, 차별에 맞서는 평등의 권리가 한 걸음씩 전진할 것이다. 차별금지법 제정 이후로 싸움을 미룰 이유는 없다. 차별금지법의 공백이 모두에게 확연히 보일 정도로, 차별을 ‘발견’하고 ‘해석’하고 ‘대응’하며 ‘철폐’하는 경험을 만들어가야 한다. ‘남녀평등’으로부터 페미니즘이 탈출할 방법도 그것이다.

 

#3/ 우리는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2010년 “며느리가 남자라니 동성애가 웬말이냐”라는 희대의 구호가 조선일보 신문광고에까지 등장했다. 피식 웃음이 나오는 구호이기도 하지만 매우 진지한 주장이기도 하다. 차별에 대한 교육을 할 때 종종 사람들에게 묻는다. 며느리가 남자라면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대부분 무슨 문제냐는 반응이다. 하지만 며느리가 남자라면, 명절 때 며느리를 부엌으로 부를 수 있을까, 시부모가 아플 때 휴가 내고 병원 모셔가는 일을 며느리한테 맡길 수 있을까 등의 구체적인 질문을 하면 당황한다. 차별을 없애는 과정은 혼란을 일으키는 과정이다.

차별받은 경험에 익숙한 사람들이 차별에 맞서 싸우는 게 더욱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추방될 것 같은 두려움”(배복주) 견고한 질서에 혼란을 일으키는 사람에게 쏟아질 비난,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될 때의 부담, 혼란을 감수할 만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원은 더욱 없는 조건. 외모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가 확산되지만 결국 포토샵 보정을 잘해주는 사진관 정보가 요긴해지는 것이 현실이다.

‘노키즈존’이 차별이라는 것을 설명하기는 수월하다. 하지만 노키즈존이라고 써붙인 공간에 침입할 용기를 내기는 쉽지 않다. 우리에게는 노키즈존 침입을 감행할 것인가, 노키즈존이 아닌 곳을 찾아들어갈 것인가의 선택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차별에 맞선다는 것은,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돌봄을 더욱 많은 사람들의 몫으로 나누고, 상업시설이 공공성을 가지게 하는 등,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는 과정이다. 세계가 겪어야 할 혼란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것이 차별이다. 그래서 차별은 평등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자유의 문제다. 자유를 확장하기 위해 우리는 혼란을 세계로 이끌어내야 한다.

“장애여성으로서 비장애여성 활동가가 다수인 단체를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에 대한 위축과 고민”(배복주)은 차별을 주장하는 것으로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고민을 모두의 고민으로 만드는 관계를 통해서만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우리가 무릎 꿇지 않고 이런 제안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법일 것이다. 서진학교(서울 강서구에 건립된 특수학교)를 짓기 위해 장애학생의 부모들이 무릎을 꿇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특수학교를 짓는다고 문제가 사라지지 않으므로. 지역사회에서 장애학생과 그의 부모들이 동료시민으로 함께 살아가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사회가 대신 무릎 꿇어야 한다. 차별의 구조를 흔들지 못하고 특수학교에 대한 편견으로 주민들이 반대에 나서게 만든 사회가, 무릎 꿇는 방식이 무엇일까. 차별행위의 인정일 것이다. 그래서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더라도 국가가 차별의 심판자가 아니라 무릎 꿇는 자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보궐선거 결과를 두고 ‘성별 갈등’으로 문제를 왜곡하는 정치의 모습은 심판자를 자처한다. ‘여성은 성차별을 받지, 그런데 남성도 역차별을 느낄 만하지, 그러면 어떻게 중재할까 또는 어떻게 회피할까.’ ‘젠더갈등’이라니. 젠더 자체가 갈등의 개념이다. 그 갈등을 개인들에게 떠넘기는 것이 성차별이다. 차별은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겪는 일이 아니라, 정체성을 통해서만 호명되는 사람들이 겪는 일이다. 우리가 호명되는 정체성을 뚫고 나와 시민이 된다는 것은 갈등을 정치공동체의 한가운데로 등장시키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갈등과 혼란을 세계로 이끌어내는 데까지 이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던져진 숙제는 무엇일까. 이 갈등과 혼란이 다시 ‘성별’ 갈등으로 환원되어 국가가 남성과 여성에게 떡고물이나 던져주고 그치게 둘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세계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인가.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누구와 함께 손잡을 것인가.

우리가 모두 고유한 존재라는 말은, 우리 모두가 세계에 혼란을 일으킬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말이다. 우리가 서로 연결될수록 우리는 더 큰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차별금지법과 함께, 페미니즘과 함께, 우리가 전진하자.

 

*이주여성 통번역사 관련 내용은 ‘공공기관 상담·통번역·이중언어 이주여성노동자 처우개선 대책위원회’의 “똑같이 일하고 왜 이주여성들만 적게 받아야 하나요” 토론회(2020.12.) 자료집을, 여성 플랫폼노동자 관련 내용은 한국여성민우회의 <제도공백:플랫폼노동 속 여성을 말하다> 토론회(2020.10.) 자료집을 참고했습니다.

 

*이 글은 2021년 5월 8일, 한국여성학회와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공동주최한 <차별금지법과 함께 전진하는 페미니즘> 긴급토론회에서 발표되었습니다.

 ➡ 토론회 다시 보기 & 자료집 내려받기 : www.youtube.com/watch?v=5QpAZLpSK7s

차별금지법과 함께 전진하는 페미니즘 웹홍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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