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살짝쿵] “능력주의/실력주의는 비장애인만의 문제?”

지난해 코로나19로 인하여 우리 사회의 ‘불평등’이 더 드러나면서 ‘불평등’이라는 단어는 세계적 화두가 되었습니다. 작년 코로나19가 시작할 때만 해도 “바이러스는 공평하다”는 주장은 곧 “바이러스는 공평하지 않다”라는 상반된 문장으로 정정되어 등장한 것을 보면 ‘불평등’의 문제를 눈치챈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서는 ‘능력주의는 불평등하다’라는 주제가 방송되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1958년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에 의해 처음 사용된 ‘능력주의/실력주의’라는 용어는 개인의 능력(merit)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분배하는 보상과 사회적 인정을 뜻합니다.

학력, 학벌의 차별에 저항으로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능력에 따른 보상은 공정하다’는 주장이 늘어났습니다. 이 주장은 ‘능력을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의 요구로 이어졌고 평가받을 수 있는 절차인 ‘시험은 매우 공정하다’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시험을 통해 능력을 평가 받았으니 이 시험에 통과한 사람만이 ‘권리를 보장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 우리 사회 통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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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말 권리는 자격이 있는 사람만 갖는 것일까요?  바로 능력주의 문제가 반차별과 맞닿는 순간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몸’이 우리 사회 기준이 되었을 때 ‘능력 없는 몸’으로 분리된 사람들. 몸의 속도가 빠르지 않은 사람, 아픈 몸을 가진 사람,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 한국어가 느린 사람, 당장 보이지 않는 가치를 생산하는 등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 사라진 존재가 되었고 점차 능력주의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된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능력없는 몸’의 존재는 능력주의 문제의 당사자로 등장하지 못합니다.

『장애의 역사』를 번역한 김승섭 교수는 “‘능력 있는 몸’은 정치, 경제, 법, 문화를 포함한 삶의 전 영역에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었고”, “얼핏 능력주의를 뜻하는 듯 보이는 ‘Ableism’이 장애인 차별을 뜻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출처:비마이너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0162)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능력주의가 왜 문제인지 교육장에서 참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것이 차별의 문제가 되는 것을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독 장애인의 노동 문제는 다뤄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 9시간을 일하고 15만원을 받는다 해도 장애인 노동의 문제는 능력주의, 실력주의 ‘문제’로 인식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철저하게 배제해 놓은 존재에 대한 문제를 드러내고자 할 때 ‘어떻게 그 사람들까지 포함하냐’며 밀려난 존재를 평등한 선상에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완전히 밖으로 밀어낸 존재는 ‘어쩔수 없다’라는 말로 쉽게 차별이 정당화됩니다.

능력주의에 대한 불평등의 문제가 일부 존재에 대하여 해결된다 하더라도 결국 차별의 논리는 정당하다고 인정한 셈이니 우리 사회 불평등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무임금 가사노동이 당연한 나의 이야기 처럼, 일을 하러 나가면서도 ‘봉사’로 불리우는 우리 엄마의 이야기 처럼요.  능력주의 문제에서 우리 사회 밖으로 가장 밀려난 존재의 이야기를 담아보고 싶어 열심히 일하고도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 당사자의 이야기를 담아 사례지에 담아 보았습니다.

사례지

그리고 본래 일의 의미, 그렇게 해도 된다는 감각이 어디서 왔는지, 차별의 논리가 적용된 또 다른 존재는 누가 있는지,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 변화 과제를 생각 해 볼 수 있도록 징검다리 질문을 구성 했습니다.

징검다리 질문

사람들은 일을 왜 하려고 할까요

먼저 “사람들은 ‘일’을 왜 하려고 할까요?”, “우리는 혹은 나는 ‘왜’ 일을 하려고 하나요?”  이 질문으로 일의 의미를 살펴보며 너나 할 것 없이 ‘일 없이는 살 수 없다’ 모두가 인정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일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할 뿐 아니라 일을 하면서 나를 알게 되고 내 인생의 가치를 세워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터는 이것을 실현해 가는 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일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임금을 받는 행위를 넘어 우리가 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일은 자아를 실현하는 계기도 되지만 부정당하는 이유도 되고,  

사회적 인정의 경로지만 무시의 징표가 되기도 한다.’ 

차별금지제정연대 [평등정책보고서] 처럼 일이 없거나 저평가 되는 것은 자아를 부정당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고 사회적 무시의 징표가 되기도 합니다.

 

‘불평등의 문제는 계급, 젠더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최저임금법 제 7조에 따르면, “정신장애나 신체장애로 근로능력이 현저히 낮은 자”는 사업주가 고용노동부 장관의 인가를 받아 최저임금 적용에서 제외 시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현저히 낮은”이라는 것은 비장애인의 생산성을 기준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은 중요한 가치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비장애인의 기준으로 짜여진 생산력에 대한 기준을 장애인이 따라가기 어려우니 비교조차 되지 못하는 장애인의 생산력은 제외시켜도 정당해지는 법안인 것이지요.

장애인을 최저임금 조항에서 배제했던 논리 중 하나로 ‘생산능력 없음’이 얘기되곤 하는데, 우리 사회가 노동의 기준을 ‘생산력’에 둘 때 생산력을 증명하기 위해 이것은 성과주의로 드러납니다. 2017년 이동통신사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여고생이 업무 스트레스를 호소하다 숨진 사건이 발생했는데, 생전 아버지와 주고받은 “콜수를 다 못채웠어”라는 문자메시지는 성과주의는 누군가를 밀어낼 수 있는 논리로 작동되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과주의에 대한 인권의 문제는 다른 기사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2020년 초 ‘의왕시 롯데슈퍼 물류배송에 로봇을 도입한 결과 5분의 1의 인건비를 줄일 수 있었다’는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이 기사에서 로봇으로 대체되어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완전히 삭제되어 사라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과와 능력이 기준되는 사회에서 장애인 뿐 아니라 노인, 여성, 청소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은 가치 있는 노동으로 평가되기 어렵고 언제든 대체되기 쉬운 노동이 됩니다. ‘언제든 대체 가능하다’라는 인식이 몸에 새겨진 사람이 부당한 요구에 맞서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불평등의 문제는 계급, 젠더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소수자 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행위를 해결이 아닌 보완하기 위해 권리를 부여하는 방식이 아닌 복지제도에서 마련하려고 합니다.  마치 장애인의 노동을 훈련이나 재활로만 인식하는 것처럼요.  복지제도는 누구나에게 필요한 권리지만  ‘일할 권리’,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권리’ 등 권리 없이 복지의 대상으로만 남겨 놓는 것은 약자를 더 취약한 곳으로 밀어내는 작업이 되어 우리 사회 배제와 차별로 이어집니다.

 

장애인 최저임금 예외조항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또 어떤 다른 상상이 가능해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가치를 쓸모로 평가하여 누군가의 노동이 저평가 되거나

임금으로 환산 조차 되지 않는지 드러나지 않는 노동에 주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어떤 이들의 노동이 가치 절하되고 차별이 심화되는지,

노동을 수행함으로서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거나 안전을 위협받는 노동이 무엇인지

다시 질문할 수 있다.”       

                                               – [2020 IL과 젠더포럼]

‘무엇’을 능력으로 볼 것인지, ‘무엇’을 가치 있는 사회적 기여로 볼 것인지 그 기준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보면 감각도 사회적 행위입니다.  동료상담, 자조모임, 권익옹호, 인권교육, 문화예술과 같은 활동들이 공공일자리 제도로 마련되기 위해서는 오직 ‘생산력’이 기준된 사회에서  ‘현저히 낮은’ 생산능력으로 평가되는 장애인의 노동이 만들어 내는 사회적기여의 가치를  읽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최근 방영되었던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마이클 샌델’이 능력주의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유명 대학들을 추첨제도로 입학할 것을 제안했는데 그 이유는 출신 학교 학생들의 오만함과 입학하지 못한 사람들의 굴욕감을 덜기 위함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어떤 제도가 있으면”  혹은 “어떤 제도가 바뀌어야” 비장애인만이 치열한 ‘경쟁을 할 수 있는 몸’이라고 생각하는 오만함과 장애인이 지속적으로 느꼈을  ‘능력없는 몸’에 대한 자기탓과 굴욕감을 덜어 낼 수 있을까요?

문화와 제도의 변화없이 ‘장애인 최저임금 예외조항이 사라진 사회’를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장애인 노동의 문제만이 아님을 인식하고 더 세밀하게 연대할 때 능력주의가 ‘누구’의 문제인지,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 글쓴이:  지나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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