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살짝쿵] 일방적 도움이 아니라, 평등을 원한다!

인권교육을 하려는 사람들과 장기간의 워크숍을 하게 될 때, 과정 중에 한번은 꼭 넣은 것이 ‘소수자와 만나는 생생토크’ 자리입니다. 이번에는 두 번의 생생토크 자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첫번째는 청소년인권활동가와 성소수자활동가를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교육참여자들이 다시 요청하여 장애인당사자활동가와 만나는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한차례의 만남이 얼마나 서로의 이해를 돕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를 땐 보이지 않는 것이 알면 보이는 것처럼, 당사자를 만나 존재감을 느끼고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은 분명 어떤 준비된 강의보다 참여자들의 마음에 파장을 남기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되돌이표처럼 등장하는 질문

생생토크를 진행할 때 가장 세심하게 고려하는 것은 당사자들의 서사를 고통을 전시하듯이 흘러가지 않게 하는 것과 청자들이 들으면서 ‘마음 아파하고 안타까워하지만’ 동시에 자기 삶과의 거리를 측정하며 딱 ‘거기’에서 멈추어버리게 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해 전부터는 준비하는 질문에 일상에서 무심히 혹은 선의라고 여기며 행동한 것이 사소한 것 같지만 당사자에겐 일상적인 차별이자 깊은 상흔을 남기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십사 부탁했고, 이를 통해서 청자들이 ‘선의’의 행동이라 여긴 것들을 돌아볼 수 있도록 다리를 놓으려했습니다.

일상적 폭력

몇 해 전에도 생생토크를 진행한 경험을 담아 교육후기를 쓴 적이 있는데, 그때 오셨던 장애인권활동가가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하철에 탔을 때 맞은 편에 앉은 분이 나를 보고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볼 때 내가 없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자 참여자 한분이 “아니, 나쁜 의도가 아닌데 그게 문제인가요? 저는 그런 시선을 보내는 게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요”라고 하며 의아해하셨습니다. 그래서 교육 후기에 ‘선의’가 만들어내는 풍경들을 다시 인권의 눈으로 돌아보는 내용을 담기도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생생토크 때마다 등장하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힘겨운 상황을 이기고 애쓰고 계신 분들을 보고 ‘대단하시다’, ‘애 많이 쓰신다’고 나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문제인가요?”

 

“도움을 주는 것이 나쁜가요? 인권교육을 받고 나면, 앞으로 소수자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힘든 이들과 만났을 때, 그이들의 경험을 들었을 때, 위로하고 싶은 마음을 나누고 싶어서 ‘얼마나 힘들었어요?’ 이런 말을 하는 게 상처가 되나요?”

마지막 질문은 지난번 성소수자 활동가가 왔을 때도 같은 질문을 했었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이며 참여자 한분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그때 충분히 이해가 되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이런 질문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더욱이 바로 몇 주 전 교육에서 나눈 이야기였다는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시 질문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질문에 대한 당사자의 답변이 부족했다기보다는 일방통행으로 ‘베푼’ 나의 ‘선의’가 문제였음을 인정하기 어려워서는 아닐까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런 질문이 쓸데없거나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반복되지만 같은 질문도 아닙니다. 물론 어떤 것은 질문하는 이의 불만이 엿보입니다. 어떤 분은 노골적으로 “아니, 선의를 선의로 못 받아들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닙니까”라고 항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듭되는 질문들에 차이도 엿보입니다. 일방적인 선의가 문제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살피려는 마음들이 담긴 질문으로 바뀌어있기도 합니다.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당사자들을 만날 기회가 없어서 서로의 경험을 잘 모르다보니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히려 이런 질문이 일어났다는 것은 문제로 여기지 않던 행동들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자 반차별 감수성을 장착하는 시발점에 섰다는 걸 의미할 수도 있으니까요.

 

‘지겹다싶을 만큼’ 기억해야 할 것 : 일방적 최선은 최악을 낳는다

일방적 배려와 보호는 당사자를 자력화하도록 돕지 못한다는 너무나 뚜렷한 한계를 갖습니다. 또한 일방적 선의는 의도와 달리 선의가 가닿은 이에겐 최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한번 ‘일방통행’, 보호와 배려라는 이름의 ‘배제’에 대해 그날의 질의응답에서 나눈 인상적인 이야기들을 전하며 되새김질 해보려 합니다.

장애인에 대한 일방적 보호

일방적 도움이 상대방에겐 낭패가 되는 순간이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하자

 

– “힘든 데 이걸 해내시다니 대단하세요”라는 말이 문제인가요?

“장애여성극단 <춤추는 허리>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이 주로 하는 인사말입니다. 몸이 꼬인 뇌병변 장애인이 올라오는 것만 봐도 사람들이 감동을 받거나 어려워하십니다. 사회가 장애인에게 넘기 힘든 장벽을 만들었기 때문에, 어렵게 부딪치며 사는 모습을 보고 문제의식을 느껴서 이런 마음이 드시는 것일 수 있어도 있고, 그 마음도 알겠지만 동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을 대할 때 조심스러움을 좀 없애고, 두려움도 없애고 이야기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대단하시다”는 말은 결국 저희의 몸을 더욱 도드라지게 느끼게 하는 말이니 건네지 말아주세요.”  

 

– “도움을 주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첫 학기에 기대감을 갖고 반에 들어가면 선생님이 항상 “우리 반에 몸이 불편한 친구가 있으니 잘 도와줘야 해” 이런 말부터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나를 주목받게 하는 게 싫었습니다. 이후에 이게 왜 불편했을까 생각해보니, 이 말은 나를 오직 장애인으로만 정체화해 버렸습니다. 내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의 선택권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 문제를 만들었더라구요. 장애인은 도움을 받는 위치에만 놓이게 되니까 관계에서 평등하거나 주도권을 갖기가 어렵게 되었어요.”    

 

– “그래도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있지 않나요?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까요?”

“사람은 누구나 혼자서 살아갈 수 없고,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니까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이 도움을 주는 행위 자체가 문제가 되진 않습니다. 다만 도움을 주는 방식에 대해서 고민을 같이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당사자가 요청하지 않아도. 긴급한 상황 같아서 도움의 말을 건네는 경우가 있을 텐데요, 그때는 도움을 드려도 괜찮은 지, 어떻게 도와줘야 되는지를 같이 물어보셔요. 장애에 따라서 도움이 실제로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장애인이 넘어졌을 때 사람들이 달려와서 도와줄 때가 있는데요, 넘어졌을 때 어떻게 힘을 주고 일어나는 지는 장애 당사자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섣불리 도와주면 오히려 더 긴장되고 위축되게 해서 본의 아니게 곤경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도움을 주는 것 자체를 조심스러워하진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은 당사자에게 묻고 하는 것이죠.”    

 

글을 마치며

“제 학교 때 별명은 ‘미소천사’였어요. 도움을 받아야 하니깐 항상 웃고 사람들도 웃어야 된다고 했던 거 같아요” 한 뇌병변 장애여성이 한 말을 떠올려봅니다. 사실 도움받는 위치에 놓여질 때 당사자가 삶을 살아갈 때 거절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 같아요. 거절할 수 없다면 도움이 선의로 느껴질 수도, 도움을 주는 이와 평등해질 수도 없지 않을까요? 장애인 당사자는 나와 소통하는 상대이지 내가 마음대로 도와주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요 감각을 키우는 것이 필요한 것 같아요. 우리는 모두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권침해가 될까 두려워하며 아예 접근도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차별과 배제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오늘 이야기 손님의 말로 맺으려 합니다.

“동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을 대할 때 조심스러움을 좀 없애고, 두려움도 없애고 이야기해주셨으면 좋겠어요.”

 

  • 글쓴이: 정주연 (루트,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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