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 살짝쿵] ‘공정’을 재구성하기 위한 도전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보안검색원의 정규직화를 두고 ‘공정’에 대한 논의가 최근 다시금 촉발됐는데요. 공기업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국민청원이 20만명을 넘겼고, 해당 공사를 비롯한 몇몇 정규직 노조가 이번 조치를 ‘불공정’하다는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불공정’의 근거로 대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보입니다. 1) 공사 정규직이 되려면 스펙을 쌓고 공부해서 치열한 경쟁률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번 비정규직은 그런 빡센 시험을 치지 않고 무임승차한 것(취준생과 기존 정규직에 대한 역차별이다). 2) 이번 정규직화 조치로 다른 정규직 채용 규모가 줄어들었다(파이를 빼앗겼다).

“인국공 정규직 전환 기사는 내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차라리 이천화재 같은 산재 사고가 더 내 일처럼 느껴진다”는 인터뷰나 “정규직들은 입사를 하기 위해 한 번의 시험을 보지만 저희는 일을 하기 위한 시험을 매일매일 치르고 있다”는 인터뷰(기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청년’의 실체가 단일하지 않으며 ‘노력’의 정도를 함부로 비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는 청년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는 식의 ‘아무말’이 정치인 입에서 나오는 걸 보면서 깊은 모욕감이 찾아듭니다.

‘공정’의 논리는 최근 몇 년새 ‘반차별’을 다루는 인권교육에서 피해갈 수 없는 주제가 됐습니다. 멀게는 ‘정유라 부정입학’으로부터 전교조나 공항공사 노조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했던 일 그리고 작년 ‘조국 사태’를 지나며 나왔던 ‘정시 확대’ 주장까지, ‘공정’을 근거로 ‘평등’이 부정당하거나 긴장을 타는 순간들입니다.

 

공정인가 평등인가

“사람들이 불평등한 사회를 선호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논문(링크)을 보게 됐습니다. ‘평등’이라는 추상적 가치에 대한 동의도는 높지만 현실의 구체적인 차별 장면에선 의견이 갈리는 현실에서 “사람들이 ‘불공정한 평등’보다 ‘공정한 불평등’을 선호하는 건 아닐까” 하는 저자들의 질문이 흥미를 끌었습니다.

이 논문은 사람들이 불평등 자체를 싫어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경험 연구는 없다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만약 평등을 선호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 상황에서 평등이 더 ‘공정’해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불평등에 대한 반감(aversion to inequality)을 보였다고 해서 그것이 곧 평등한 분배(equal distribution)를 추동하는 요인이라는 증거는 없다는 것인데요, 분배 실험 참여자들이 받는 사람의 필요(need)와 기여(merit)에 대한 고려를 한다면 다른 선택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논문에 소개된 실험 중 하나는 6-8세 어린이들이 실험 참여자로 등장하여 청소를 마친 다른 두 소년에게 지우개를 분배해주는 세팅입니다. 똑같은 개수를 나눈 뒤 하나가 남았을 때 어린이들은 어느 한 명에게 더 주기보다 그냥 버리는 선택을 합니다. 지우개를 받는 이들이 상대가 몇 개를 받았는지 모른다는 조건도 앞서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어린이들이 불평등에 대한 반감을 가진 것으로 해석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받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을 하자 지우개 분배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공정함'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지우개 분배 실험을 설명하는 슬라이드 이미지 입니다.

청소를 한 두 명 중 한 명이 일을 더 많이 했다는 걸 들은 어린이들이 이번에는 남은 한 개의 지우개를 일을 더 한 사람에게 준 것입니다. 이는 분배 과정에서 어린이들이 기여를 고려하여 판단한 것이라고 논문은 말합니다. 사람들이 가진 공정성 직관(fairness intuition)과 평등에 대한 경향성(equality bias)을 구별하여 어느 가치에 사람들이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보여주는 실험 사례로 ‘룰렛 돌리기’도 언급됐는데요. 위의 지우개 분배 실험에서 어린이들이  ‘룰렛’ 즉 임의의 결과에 따라 지우개를 나눠준다면 설령 불평등을 초래한다 하더라도 어린이들은 그 방식을 받아들였답니다. 동전 돌리기나 추첨처럼 불편부당한(impartial) 혹은 인간이 어찌해볼 수 없는 것에 의한 결과는 사람들이 ‘공정’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거죠.

그리고 나면 미국인들이 미국 사회의 경제 불평등에 반응하거나 반응하지 않는 이유도 설명됩니다. 현실에서 사람마다 노력의 정도, 능력치, 도덕적으로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것(moral deservingness) 등이 다르다고 할 때, 공정한 시스템은 그런 개개인의 차이를 고려하는 시스템이고, 현실의 거대한 불평등을 깨닫지 못하는 한 어느 정도의 불평등은 자기 노력에 따른 신분 이동가능성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사회적 믿음이 작동한다고 논문은 말합니다. 만약 현 시스템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이 폭발한다면 그건 불평등 자체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기보다는 부의 재분배 과정이 불공정하다고 여기기 시작한 것이라는 지적도 눈에 띄었습니다.

 

무엇을 공정하다고 말할 것인가

위 논문은 공정성 직관이 인간에게 보편적이고 본능적인 감각이라고 말합니다. 협력이 중요했던 사냥과 수렵채집 시절을 거친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속임수를 쓰는 자, 무임승차자를 가려내기 위한 감각으로 발달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기여에 근거하여 자원을 분배한다고 할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여로 볼 것인지에 대한 감각은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다르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지금은 1인1표가 공정하다고 생각하지만 근대적 감각이라는 점, 마찬가지로 의료시스템이나 고등교육에 모두의 평등한 접근을 보장하는 것이 공정한지 아닌지는 사회적 논쟁을 통해 만들어지는 감각임을 언급합니다. 한국 버전으로 보자면 “토지는 국유”이며, 토지의 “상속, 매매, 유증(유언으로 넘겨주는 것)” 금지를 규정했던 임시정부 건국강령(1941년)과 종합부동산세를 사유재산 침해라고 말하는 감각의 차이처럼요. 저자는 심리학자로서 말할 수 있는 최대치를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 권리로 보장되어야 하는지, 즉 ‘merit(기여/업적/능력)’에 상관없이 동일하고 가변적이지 않게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둘러싼 합의되지 않은 부분이 존재한다고요. 그럼 그 다음은, 인간다운 삶의 구체적 내용을 적극적으로 외치고 사회의 책임과 국가의 책무를 추동할 수 있는 공동의 감각을 만드는 적극적 행위이고, 활동가 혹은 인권교육가들에게 남겨진 몫이란 생각이 듭니다.

 

공정을 ‘반차별’의 언어로 재구성하려면?

위 논문에서는 분배의 공정성을 판단하는 인간의 심리에 왜 ‘노력’이나 ‘기여’, ‘도덕성’이 작동하고 가령 ‘키’는 작동하지 않았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직 비어있다고 말합니다. 이를 인권교육 버전으로 바꿔본다면, “사람들은 왜 ‘고용안정성’이나 ‘임금’과 같은 적절한 삶의 수준을 모두가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로 생각하기보다 ‘시험’을 통과한 소수만이 누리는 특권으로 생각하는가” 질문을 던져보게 됩니다.

다른 한편으론 ‘공정함’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생각해 봅니다. ‘정유라-최순실’과 ‘조국 자녀 특혜 입학’ 논란을 지나며 정시 강화 혹은 ‘공정한 객관식 시험’으로 귀결되는 것은 사회적 자원 분배 과정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외침이라는 생각도 들고, 이는 신분세습을 타파하며 근대를 열어젖혔던 ‘능력주의’가 갖는 모종의 힘을 떠올리면 일면 가능한 외침이란 생각도 듭니다. 다만 공정성 주장이 절차적 합리성을 요구하는 것으로만 귀결됐을 때, 시험이 차별의 정당한 근거가 되고 차별을 재생산하는 현실을 문제 삼기 어려워지는 지점에 대한 우려가 있습니다.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조치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되거나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다시금 선별하는 지독한 ‘각자도생’만 남는 현실입니다.

차별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일 때 빈곤의 자기책임론은 강화되고, 높은 경쟁률을 뚫지 못한 자신의 노력 부족을 탓하거나 노력 없이 무임승차한 이들에 대한 비난이 커집니다. “떼쓰지 말고 너네도 시험쳐서 들어오라”와 같은 말이 나오는 것처럼요. 공정성에 대한 감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공정한 것으로 볼 것인지를 물으며 설득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것은 ‘교육’만이 아니라 거리에서의 싸움을 통해 가능할 것입니다. 가령 “네덜란드 의대 입시는 추첨 방식이다”라거나 “알래스카의 기본소득(영구기금, APF)은 난민신청자에게도 지급한다”와 같은 사례를 소개하며 각각의 사회는 어떤 철학에 기초한 것일 것일까 묻기도 하지만, 새로운 감각은 해외 사례의 소개만이 아니라 직접 살아보고 경험해봐야 만들어질 테니까요.

반차별 교육에서는 여러 정체성과 억압이 촘촘하게 얽혀있는 매트릭스 속에 나는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인지 살피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곤 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의 중요성이기도 하고, 온전히 피해자이기만 한 사람은 없다는 자각 속에 자신의 가해가능성에 대한 성찰도 열릴 수 있습니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연결된 존재로서의 감각, 더 불리한 위치에 있는 존재에 대한 인정, 그리하여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함께 말하는 데 이 ‘공정’에 대한 감각을 재구성하는 작업이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작성: 날맹(문명진,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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