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을짓는사람+들] 안식년, 이렇게 살았어요.
- 상임활동가 루트의 이야기입니다.

인사~꾸뻑

“들사람들” 텔방이라도 눈팅을 했어야 하는데, 안식년 처음 한두 달은 눈팅 하다가 나중엔 거의 안봤더니 새로 ‘들’어 온 신입회원들은 어떤 분들인가 궁금하고, 요즘 주로 어떤 회원들이 활동하시는지 몰라서 인사부터 합니다.
저는 들 상임활동가 “루트”이고요, 2019년이 안식년이라서 지금 쉼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러나 곧 2월 초에 복귀하니 조만간 만나게 되겠죠??!! 허걱, 그새 복귀라니.

 

이렇게 살았어요~

이사를 했습니다. 안식년이 이사 하나 하고 거의 다 간 듯. 안식년 한달 후부터 집을 보기 시작하고 집을 구하고, 이사를 하고, 이사한 후 사건사고도 많아서 내내 “이사+ing”인 채로 열 달을 살고 있습니다. (제가 좀 복잡한 이사를 했거든요. 살던 집과 옆지기 작업실을 합쳐서 한곳으로 옮기는데 이사과정에 많은 문제가 생겨 무려 다섯 차례로 쪼개어 이사가 이루어졌지요. 흑, 한번 하는 이사인데 말이죠!!)

하나를 더 보태자면, 엄마가 아프셔서 걱정과 간병이 제 안식년의 시간을 야금야금 먹어버렸습니다. 다행히 10월 한 달은 어렵게 시간을 내서 멀리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게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지요. 광활한 대지를 만나고 오니 복닥거리던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여행 초창기 사진은 온통 제 머릿속에 두고 온 서울살이로 가득해서 사진 속 얼굴표정이 우중충(==;). 그러다 한 두주 지나며 대자연 속을 걸어 다니니 얼굴이 조금씩 맑아지더군요. 역시 무념무상으로 걸어야 하는가 봅니다. 요기까지가 간략한 저의 안식년 생활사였습니다.

 

루트가 보내준 사진들. 이사 후 집을 꾸미기 위해 일하는 모습과 여행지에서 걷고 있는 루트의 뒷모습, 집 안에서 창밖을 향해 찍은 풍경.

 

아직도 “이사+ing”인 이야기로~

오래되고 낡은 집을 구해 이사를 하다보니 손 볼 곳이 많았습니다. 집을 손보는 데에는 대부분 저와 저의 옆지기가 열심히 갈고 닦고 붙이고 칠하고, 우리가 할 수 없는 공사는 일하시는 분들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시는 날이면 늘 하나씩 작고 큰 사건사고가 났지요. 제일 크게는 누수가 나서 거의 이사 후 두 달 가까이 짐도 제대로 풀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누수가 어디서 나는지 알아내는 동안은 밥도 못해먹고 심지어 어디서 새는지 알아보느라 물을 잠그면 화장실도 못쓰고 공중화장실로 달려 나가야 했습니다. 누수 때문에 공사가 덜 끝나서 문도 설치를 못하고 열쇠도 잠그지 못하니 옆지기와 저는 교대로 집밖 출입이 가능했습니다. 밥을 사러 갈 때도, 화장실을 갈 때도. 정말 처절했지요. 그러나 물리적 어려움보다 두려운 것은 경제적 공포. 40년이 넘은 집이라서 어디서 새는지 찾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게 주변 모든 사람들의 반응. 게다가 3명의 누수탐지전문가들이 다녀가도 찾아내지 못하니 애가 타고 속이 타들어가는데 오가는 사람들은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 “이래서 집 고치는 게 어려워요. 새로 짓는 게 낫지”라거나, “누수 잡기 어렵다던데…걱정”이라거나, 아니면 “전 주인이 속이고 넘긴 거 아니냐”는 의심의 발언들을 쏟아내곤 했습니다. 심지어는 “지신(地神)이 새로 온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나봐요. 고사라도 해봐요”라는 말까지. 이 모든 말들은 불안한 마음에 기름을 붓는 격이어서 새벽 2-3시면 불안감에 잠이 깨서 둘이 동이 터오는 아침까지 내내 밖에 쪼그리고 앉아있곤 했지요. 만일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면 어쩌나…돈도 없고 집을 다시 지을 수도 없는데….살이 쭉쭉 내리는 나날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내고 몇 주 만에 네 번째로 오신 누수탐지전문가가 마침내 누수의 원인을 찾아내셨지요. 그러나 젖은 벽들을 말리고 다시 벽을 마감하고 짐을 풀기까지 계절을 건너 가을이 되었지요.

누수를 잡고 보니 사고는 보일러 시공을 한 분의 실수로 일어난 것임이 밝혀졌지요. 그것이 저희를 괴롭힌 제일 큰 사고였지만, 누수가 잡히고 난 후에도 일하러 오신 분들이 어찌나 거칠게 일을 하시며 사고를 내시는지 거듭 속앓이를 했습니다. 새로 한 바닥재에 공구들을 탕탕 내려놓으시니 사용도 하기 전에 헌바닥처럼 되고, 일하시며 두꺼운 유리창을 와장창 깨뜨리기도 하시고, 파편 튈 수 있는 일을 아무런 보강을 안하고 하시며 가구며 전자제품들에 상채기를 남기시고. 아무튼 이런 저런 사고가 매일매일 터지곤 했지요. 하지만 “살살해주세요”라거나, 실질적 손실에 대해서 “물어주세요”라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소중한 일당을 그렇게 제하고 드릴 순 없으니까요. 그때마다 ‘그래.. 대세에 지장없다. 사는데 파이고 깨지는 것쯤이야. 모든 물건은 쓰면 닳아지는 것이니, 너무 티없이 살려고 하지말자’고 스스로를 다독거렸습니다.

 

‘돈 값’에 대한 사유(思惟)

거친 노동의 흔적들로 속상해진 마음에 위문 와준 지인에게 푸념을 했습니다. 돌아온 말은 역시나, “돈 값을 하는 거야. 네가 더 질 좋은 노동을 얻고 싶으면 비싼 대가를 내면 돼.” 너무 당연하게들 하는 이 말이 제 귀에 탁탁 걸렸습니다. ‘노동의 질’로 ‘노동의 대가’를 계산하는 것이 영 불편했습니다. 노동자에게 우리가 지불하는 것은 노동력의 대가인 것이지, 노동의 대가가 아닌데 노동의 대가에 따라 노동의 질을 요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마뜩치 않았습니다. 상품조차도 원가로만 계산해선 안 될 것인데, 하물며 용역과 서비스 노동에 대해서 ‘노동의 질’과 ‘노동의 대가’를 등치시켜 놓고 계산한다면 그 기저엔 ‘내가 돈을 냈으니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것이 깔려있는 말이겠지요. 이런 식의 얘기를 하는 사람들 치고 노동의 가치를 따로 따지는 사람은 없더군요. 돈 몇푼 내고서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건 문제라 생각하지를 않는 게 “돈 값”이라는 말로 정리되어 당연스레 여겨지는 것이 마음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이사가 남겨준 단상…

연애를 하고, 연애가 몇 번 깨지고 나면 나를 알게 된다고 누가 그러더군요. 그런데 저는 이사를 하며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갔던 것 같습니다. 첫 번째로, 그 작은 집에 제가 욕심 사납게 어찌나 많은 것들을 꼭꼭 쟁이고 살았는지 알았고, 버리고 비우는 법을 다시한번 크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버리고 비우는 과정이 아깝고 아쉽기보다 비울수록 시원해지는 마음, 가벼워지는 생활을 더욱 확연히 알게 되었지요. 그러나 아직 더 비울 것이 많다는 걸 알지만요.

장애인과 더불어 사는 법을 모를 때, 비장애인들이 저지르는 실수가 장애인 당사자가 부당하게 행동할 경우에도 행여 문제제기했을 때 자신이 차별하는 사람으로 비춰질까 두려워 그냥 꾹 눌러 참아 대응하는 경우가 있지요. 서로를 동등하게 위치지운다면 이렇게 하지 않겠지요. 이사 과정에서 제가 얻은 또 하나의 깨달음도 이와 비슷한 처신에 대한 성찰이었습니다. 노동력의 대가를 후려치려는 사람들, 노동자를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만 할 줄 알았지, 마땅한 요구조차 삼키기만 하는 나는 노동자와 나를 어떻게 위치지우고 있는가 생각해보게 되기도 했거든요. 평등을 실천하며 사는 것은 참으로 끊임없는 배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다시 절감했습니다. 꽤 오랜 세월을 살아왔는데도, 아직도 경험 못한 세상,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는.. 그래서 여전히 낯선 곳에서 낯선 만남이 이루어질 때 평등의 감각을 어떻게 벼려야 하는지 몰라서 허둥대는 나를 발견했던 것 같습니다.

집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 '꿈' 조형물과 동틀녘 하늘과 풍경이 보인다.

<사진: 며칠 전 아침 풍경. 2020년 2월 안식년 복귀를 앞두며 어떤 꿈을 꿀까.. 생각에 젖으며 찍어 본 사진~.>

 

이렇게 복닥거리고 깨달으며 어연 11개월이 지났군요. 남은 몇 주의 시간은 이제 슬슬 복귀의 시동을 걸어야 할까… 싶지만, 아니요. 그냥 이제 좀 제대로 쉬어봐야겠습니다. 떨어진 교육의 감각은 복귀 후 슬슬 회복해도 되겠죠. 안식년(安息年)은 말그래도 편안한 쉼의 해이니까요. See you soon. ^^~

*작성: 정주연(루트) /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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