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한순간] “평등없는 자유는 승자독식을 정당화하고, 자유없는 평등은 예외없는 열악함에 굴종하게 만든다.”

얼마 전 수능성적 발표가 있었다. 만점자, 등급, 난이도 수능에 관한 뉴스가 포털을 도배한다. 특히 올해는 외고 출신, 1학년때 내신 꼴등에서 두번째인 학생이 수능만점이라는 것이 더욱 화제가 되었다. 사배자 전형, 수능 이런 “노오력”을 강조하는 공정성의 신화를 몸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대입신화는 전국민에게 해당될까? 입시에서의 공정함은 전국민의 자유, 평등을 보장할까?

처음 학종이 도입된 것은 학생들의 다양한 능력을 존중하기 위해서였다. 즉 21세기는 지적 능력만 중요한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학생들이 다양한 활동을 통해 역량을 기르고 이를 생활기록부에 기록하여 획일화된 입시 능력 즉 시험을 잘보는 능력이 아니라 다양한 능력이 대입에 반영되도록 한 것이다. 이는 학습자와 대학에 모두 ‘선택의 자유’를 보장한 것이다. 학생들에게는 학업 이외의 또는 수능 성적을 뛰어넘을 만한 역량을 보여줄 기회를, 대학에게는 다양한 전형으로 학생을 뽑을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가 ‘자유’로 기능하기에 현실은 너무 불평등하였다. 학교에서 하는 천편일률적인 봉사활동이 아니라 병원, 대학 등 대학 교수의 구미에 맞는 봉사활동은 일반 학생들에게는 다가갈 수 없는 자유였다. 대학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위 대학입시제도의 핵심을 결정하는 수도권 10여개 대학은 이리저리 전형방법을 다양화하며 학생을 뽑을 자유를 누렸고, 실제 특권계층의 자녀를 뽑는 편법을 다양한 학생선발권의 이름으로 누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수도권 10여개 하위대학들은 그 대학에 가고 남은 학생들을 선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심할 뿐, 그 대학의 인재상에 맞게 학생을 선발할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 적어도 대학은 선발권이라는 권력이라도 누렸지만, 학생은 그 선발기준의 맞춰야하는 ‘을’의 입장이기에 학생들의 다양한 역량을 보여줄 기회는 충족시켜야할 다양한 과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수능 중심의 정시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대평가를 통해 상위권 학생을 변별해는 기능을 중심으로 하는 수능 시험은 이미 고교 교육과정과 멀어진지 오래이다. 즉 80%의 문제들은 고교 교육과정에서 출제되지만, 20%의 문제는 고교 교육과정의 내용에서 글자를 따와 선행학습 없이 다룰 수 없는 문제가 나온다. 결국 어렸을 때부터 선행학습과 사교육의 토대위에서 공부해오지 않은 학생은 당연히도 풀기 어렵다. 그러하기에 늘 정시에서는 재수생이 강세이다. 하지만 재수 역시 대학등록금 만큼 이나 비싼 재수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많이 선택할 수 있다. 재수를 패자부활전이라고 하지만, 패자 중에서도 돈있는 사람들만 선택할 수 있는 부활전인 것이다. 이렇듯 평등하지 않은 토대에서의 자유는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을 정당화한다.

자사고와 특목고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사고와 특목고를 없애는 데 대해 해당학교들은 줄기차게 학교 다양성을 이야기한다. 즉 학교 나름의 특별한 교육과정을 꾸리고, 학생들은 이를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그 교육 수혜의 당사자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고 학비를 세 배나 내는데 이것을 왜 빼앗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고가 정상화되지 않는 것은 일반고의 문제이지, 왜 잘하고 있는 학교들을 없애냐는 논리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학교들은 ‘학생선발권’을 포기하지 않는다. ‘학생선발권’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자사고와 특목고는 학생의 선택권을 보장한 것이 아니라 ‘선택된 학생’들과 ‘선택되지 못한 학생들’의 집단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이와 더불어 3배의 학비를 선택할 수 있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여러 선택지에 대해 이미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자유’가 되지 못한다.

결국 대학입시의 공정함은 상위 10%안에서 가장 치열하다. 나머지 90%는 이 고착화된 불평등을 얘기할 언어도 없고, 자격도 부여받지 못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장 위험하다는 배달 노동과 택배 노동을 거쳐 그나마 고정적인 직장 조차 안전조치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발전소 등의 시설관리직이다. 이렇게 흩어진 90%는 목소리를 낼 여력도 없고, 자유도 없다. 그들의 현재는 늘 ‘벗어나고 싶은 현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90%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이들이 갈 수 있는 노동시장은 예외없이 열악하다. 그리고, 이렇게 열악한 현실은 최저선보다 조금 나은 노동환경에 대해 ‘특권’이라는 이름을 붙이도록 만든다. 즉 상위 10%의 특권은 공정한 경쟁의 결과로 인정하고, 그 이하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복지는 ‘특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평등없는 자유가 사회의 책임을 ‘내 탓’으로 만들고, 이러한 ‘내 탓’은 목소리 낼 자유를 억압하고, 현실은 예외없이 열악한 상태로 ‘평등’해진다.

수능성적이 발표된 이번 주는 故김용균 1주기 추모주간이기도 하다. ‘공정함’으로 둔갑한 특권에 저항하는 자유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작성: 우돌(활동회원)

텔레그램 채널구독

인권교육센터 들이 운영하는 텔레그램 채널을 구독하시면 들의 최신 소식을 가장 빠르게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